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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Oct 10. 2021

비록 운명일지라도

민음사 '인생 일력'데일리 명언 에세이 20 -2021년 1월 20일

오늘은 오늘, 어제는 어제 
봄이면 봄, 겨울은 겨울,
이렇듯이 이렇게 
처음 따라 끝에 가리 

-이덕무 <관명>





이 글은 조선 후기의 북학파 실학자인 이덕무가 20대 초반에 쓴 글이라고 한다. 그는 윤가기의 <적언>이라는 책의 여덟 장절에 얹어 각각 4언 16구로 시를 지어 벗의 책에 대한 찬사로 선물했다고 한다. 이 시에는 젊은 날의 이덕무가 꿈꾼 쾌적한 삶을 위한 여덟 단계이자 인생이라고 한다.  (참조 : 열여덟 살 이덕무, 민음사, 정민 편저)  


오늘은 오늘, 어제는 어제, 봄이면 봄, 겨울은 겨울

이렇듯 이렇게 처음 따라 끝에 가리

2020년을 생각하면, 삶은 결국 개척도 하지만 관명을 따라가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오늘은 오늘, 어제는 어제, 봄이면 봄, 겨울이면 겨울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한번 들어오기 시작하면, 하염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뱅글뱅글 맴돌게 된다. 고향에서(정확히는 가장 오래 살아온 고향과 같은 곳) 오랫동안 다닌 직장을 떠나게 될 줄을, 그리고 계속 다니고 싶었던 새직장으로 이직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본인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내 앞에 주어진 운명과 운이 같이 동반되었기에 (과연 운이 맞을까 하지만)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마주친, 그 타이밍- 그것이 운명일지도

항상 그 '타이밍'이 문제였다. 운 좋게 한정판 에디션 장난감을 구할 때도 내 앞에 마감이 되기도 했고, 반대로 내가 마지막 상품을 얻은 적도 있다. 최종 1명이 합격되는 면접에 4명 중 1명은 못 들었는데, 40명 중 1명이 되기도 했다. 로또의 당첨률이 대충 800만 분의 1이지만, 실제 당첨자는 많다는 아이러니한 사실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에 각기 다른 타이밍을 만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운명을 인정하나, 나아가는 길에는 인지하지 않고 걸어가는 것, 그것이 관명대로 사는 길

 얼마 전 철학독서모임에서 르네상스 시기의 철학자 쿠자누스의 파트를 읽으며, (책에서도 나온 문장이기도 한) 인간에게 의지가 있느냐, 아니면 신이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사는 것인가, 또는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왜 인간들이 악을 저지르는 세계를 만들었으며, 이 악이 인간의 책임이라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신이 모든 것을 미리 결정했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라는 물음에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답은 각자가 가진 종교관과 가치관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나에게 지긋한 신앙심이 있거나 강한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어떤 환경과 가정, 시대를 타고 태어나며, 가진 재능과 기질 자체가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괴로워하고 원망하던 못난 시기가 나에게는 꽤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인정한 순간, 그 운명을 면밀하게 살피며 나아갔을 때 스스로 감정을 컨트롤하면서 차근하게 밟아 올라왔던 것 같다. 떨어지는 시기도 있다면 올라가는 타이밍도 어느 순간에는 영화처럼 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살포시 다가오기도 하였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며 사는 것, 그것이 이덕무가 말하는 '관명'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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