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부남 - 물외(物外)에 서서 바라보다

2020 퍼블릭아트 7월호 Vol.166

by 연두


mosa8NadCq.jpeg?type=w1100 <상생> 2010 캔버스에 혼합재료 130×164cm


충북 진천군 문백면 진천공예마을 내에 자리 잡은 예술가들의 작업실 중 계곡물이 옆으로 흐르는 산 아래에 노출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은 그 일대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공간이다. 주인의 안목과 취향을 느낄 수 있는 수려한 정원 속에 ‘물외당’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린 아담한 목조건물은 계절을 변화를 오롯이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며, 그 안에 앉아 세상 밖을 바라보면 ‘물외’라는 명칭에 걸맞게 세속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고즈넉한 공간의 외벽에는 한 점의 회화가 걸려있는 것이 퍽 인상적이다. 정원수에 폭 둘러싸인 탓에 언뜻 보면 한옥 외벽에 그린 벽화로 보일 수도 있지만, 면밀히 들여다보면 돌가루를 섞은 안료를 물감으로 삼아 나무, 새, 꽃, 사람 등 삼라만상의 모든 생명이 생동감 넘치는 선묘로 화면을 가득 채워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중심에는 벌거벗은 남자의 징을 치는 소리가 화폭을 넘어 세상의 만물을 깨우고 감상하는 이의 귓가에까지 맴도는 것 같아, 마치 ‘물외당’ 주변에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모든 생명이 화면 속 남자의 징의 울림에 깬 듯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된다. 화이트큐브에 벗어나 자연과 직접 마주하며, 몇 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품 <징>(2011)는 물외당의 주인 화가 손부남의 ‘유무상생(有無相生)’를 기초로 하는 작업관이 투영되어 있는 드로잉이다.

손부남은 90년대 초부터 ‘상생(相生)’이라는 주제로 묵묵히 도를 닦는 수행자와 같이 자신의 작업세계를 꾸준히 구축해온 작가이다. 오늘날 많은 예술가들의 예술적 행위가 ‘무엇이 좋은 작품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이라면, 그는 극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묵묵히 외길로 걸어온 화가이다. 그가 꾸준히 연구해온 작품세계는 원시미술과 전통 서예에서 모티브를 가져와서 사물과 동식물을 평면적 도상으로 표현한 것을 큰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단순화된 인물과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하는 새, 그리고 소, 말, 연꽃 등 여러 동식물이 서로 어울려 화면을 가득 채우거나, 사각으로 분할된 화면 속에서 여러 색채의 드로잉을 빽빽하게 겹치고 쌓아 올리는 기법은 바위나 동굴 위에 새겨진 암각화와 같이 캔버스 안에서 거칠고 두꺼운 질감과 촉각적 경험을 체화하도록 유도한다.

‘원시성’에서부터 출발하다.


그의 회화양식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추기까지 가장 주요한 조형적 해법은 ‘원시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중 그의 작업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울산 천전리 암각화이다. 천전리 암각화는 천이 흐르는 곳보다 약간 높은 곳에 있으며,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 시대까지 동물형상의 면그림과 기하학적인 선묘가 겹쳐 새겨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이다. 너비 9.5미터, 높이 2.7미터 규모에 앞으로 기울어진 정방형 암벽에는 숭배의 대상으로 묘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슴, 물고기 등 동물형상과 가면과 비슷한 형태의 사람 얼굴, 귀족, 가마 행렬 등 인물상, 그리고 마름모꼴, 삼각, 동심원 등을 포함한 추상적인 도형과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쪼아파기, 갈아내기 등의 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암각화의 동식물 도상들은 상징의 기호로써 자연을 관찰하고 재현하는 것이 아닌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고대인들의 사상이 담겨있다. 이 암벽 위에 거친 요철로 새겨진 구상과 비구상의 형태가 동시에 중첩되고, 각 시대마다 집단 무의식이 혼재하고 있는 바위그림이, 억겁의 세월을 지나 작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이다.


따라서 손부남이 현재까지 집요하게 탐구하고 파고들어 왔던 <상생> 작품 연작들은, 그 화면을 찬찬히 뜯어볼수록 자연의 원초적인 생명성에 대한 경외와 흠모, 동시에 세상을 바라보는 온화하고 해학적인 시각이 녹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암각화의 도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며, 작가의 무의식이 즉흥적으로 도출되는 것만으로 단정할 수 없다. 이미 그가 젊은 시절부터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살아가면서 교감하고 포착한 삶의 단편들, 그 자체이다. 작품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있다>(2011)는 선과 면으로 단순화된 새와 인간 측면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그 여백을 다양한 동식물의 도상으로 가득 채웠다. 이와같이 때로는 반추상적이고 평면성이 강한 동식물의 도상과 인간의 형상들이 율동감이 넘치게 화면을 가득 메꿔가거나, 때로는 절제된 구성으로 변화무쌍하게 결합하는 작가의 노련함과 조형적 완성도를 통해 그가 얼마나 자신의 작업 세계와 삶을 일치시키려 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질감’의 탐구에서 세월 위에 새기다.


회화에서의 질감을 중요시 여겨온 손부남은 돌가루, 바인더, 아크릴 물감 등을 섞어 부조적인 느낌과 마띠에르를 강조해왔다. 화면 안에서의 질감 탐구는 2000년대 초반 진천공예마을에 작업실을 직접 설계하고 지으면서 변곡점이 생긴다. 2015년 우민아트센터에서 개최한 개인전 <황폐함을 어루만지다>전에서 그의 작업은 캔버스의 틀에서 벗어나 그동안 자신이 모아왔던 버려진 사물들과 건축과정에서 생겨난 폐자재에 눈길을 돌려 자신의 드로잉을 입히기 시작한다. 당시 손부남은 직접 설계한 작업실을 지을 때, 도시개발로 철거 직전의 절의 목재를 옮겨 작업실의 대들보로 설치하고, 바로 옆 작은 사랑채 공간인 물외당을 지었다. 또한 오래된 골동품과 버려진 사물들은 작가의 정성스러운 손길로 털어내고 어루만져 작업실과 정원의 한 요소가 된 것이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어떤 세월을 견뎌온 흔적이 훌륭한 질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의 작업은 캔버스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유희하기 시작하였다. 즉 그는 이제 캔버스 위에 요철과 마띠에르를 내기 위에 인위적으로 물감을 두텁게 올리거나 돌가루를 사용하지 않고 폐자재에 켜켜이 쌓여있는 시간의 층위를 질감과 물성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또한 작업의 원천이었던 암각화의 틀에서 벗어나 삶과 작업의 거리는 한층 더 가까워 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상에서 쉽게 쓰이는 보통의 사물일지라도 시간의 흔적이 쌓일수록 그만의 가치가 생성될 수 있으며, 그 흔적의 가치는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그의 작업 ‘상생’이라는 범주 안에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손부남은 꾸준하게 그려온 도상학적 드로잉 이미지들을 오브제에 그리는 것에 한걸음 더 나아가 조각적 형태로 구현하여 완전히 해방시키기를 시도하고 있다. 화면 속에 가장 많은 등장하는 새와 인간은 쇠, 스티로폼과 같은 건축자재에서 찾는 여러 질감의 재료를 사용하여 3차원의 공간에 자유롭게 유영할 것이다. 평면성이 강한 도상적 이미지들이 입체의 강한 물성을 지닌 상태로 공간을 점유했을 때, 그 이미지와 마주한 관람자의 체감은 이 전 그의 회화에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미감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그동안 구축해놓은 작업세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그의 조형적 실험이 그가 즐겨 그리는 자연 속의 새처럼 훨훨 날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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