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빈, 이상홍, 조이경 <지금, 여기> (스페이스몸, 청주, 2019)
지금으로부터, 회화에 대한 물음
박해빈, 이상홍, 조이경이 청주 스페이스몸미술관에서 개최한 <지금, 여기> 전시는 현재 청주에서 작업 활동을 하는 박해빈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청년 예술가 생애 첫 지원’의 기금을 받아 외부에서 활동하는 두 명의 작가를 초대하여 기획한 3인전이다. 박해빈 본인이 작가로도 참여한 이 전시는 ‘평면 회화의 본질에 대한 관심을 시각화하여 새로운 시각적 인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업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기획의도를 가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회화의 위기, 더 나아가 미술의 위기라는 반복된 말에 익숙해진 것 같다. 무수히 쏟아지는 이미지의 홍수, 새로운 매체들이 미술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하더라고 회화는 우리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역사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통적인 미술매체이다.
참여작가 중 꾸준히 회화작업을 해온 이번 전시의 기획자이자 작가인 박해빈 외 다른 두 명의 작가는 우리가 보통 떠오르는 전통적인 회화작업보다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자신의 조형 언어를 탐구해 온 쪽에 가깝다. 즉 그림을 이야기하지만 그림과 공간, 그림과 작가와의 관계, 그리고 그 태도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전시이기도 하다.
박해빈은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입주 이후, 청주에 자리를 잡은 작가로 볼 수 있다. 그녀의 작업실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여타의 다른 작가들과 같이, 비교적 상업적 접근성이 낮은 조용한 동네 골목의 빈 점포를 <빈공간>이라는 작업실로 쓰고 있다. 이 조용한 도시에서 묵묵히 작업을 해온 것이다. 잠시 <빈공간>을 소개하자면, 이곳은 단순히 박해빈 작가의 작업실만 쓰는 폐쇄적인 공간이 아니다. 1층 상가 건물 형태인 작업실 윈도 밖에서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형태의 전시 부스를 만들고, 그 안에 시각 예술작품을 전시하여 불특정 다수 누구나 관람할 수 있는 형태로 구성한 윈도 갤러리이다. 작업실 밖에서 감상할 수 있는 윈도 갤러리는 작가가 직접 기획하거나 초대한 시각예술가의 작품이 전시되는 공적인 전시공간이고, 그 안쪽은 박해빈의 사적인 작업 공간으로 사용함으로써, 외부의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의 창’ 역할을 하고 있다.
평범한 도심의 동네의 일상에 툭 튀어나온, <빈공간>과 같이 박해빈의 작업은 일상에서 우연히 느끼는 이질적이거나 낯선 상황들, 혹은 익숙함에 지나쳤던 내면의 세계를 회화로 표현한다. 따라서 박해빈의 회화에는 우리 눈에 익숙한 평범한 풍경이 주로 배경이지만, 화면의 한 켠에 툭 튀어나오는 이질적인 사물이나 찰나의 장면들이 등장하여, 어딘가 기외 하게 혹은 낯설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지금, 여기> 전시에서 박해빈은 이전의 작업에서 보여주었던 몽환적인 풍경들, 구상적인 이미지들보다는 화면이 단순화된다. 점과 선이 반복, 교차되거나 색채로 최소한의 조형요소와 추상적 이미지들이 일으키는 착시로 시각적 환영을 극대화한다.
스페이스몸미술관 제 2전시장 벽면에 설치된 작품<???>은 5미터 길이의 캔버스천 위에 모노톤으로 캔버스의 주름을 리얼하게 재현하고, 그 위에 중첩된 또 다른 큐브 형태와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은 2차원 화면에 3차원의 형태를 재현했을 때의 왜곡과 착시를 극대화시킨다. 이 시리즈는 제3전시장의 각기 다른 사이즈의 캔버스에도 서로 다른 도형과 시점으로 분화되어 표현된다. 단, 여러 형태로 잡힌 캔버스의 주름은 흰색으로 도색된 전시장 벽면과 밀착되어 작품과 작품사이, 작품과 공간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트리고, 서로의 영역을 간섭하기 시작한다. 사실 이것은 이미지의 직접 적 간섭이 아닌, 우리의 인지의 오류나 시각적 변용이 클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시각적 유희를 화면 안에 던져,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문득 마주하는 어떤 순간을 떠오르게 하는 감각을 불러일으키며, 또한 회화가 가진 고유의 성질을 충분히 다시금 지각하게 한다.
이상홍은 이질적인 것들이 접목하여 발생하는 간극으로 도출되는 ‘소통의 확장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조형드로잉’이라는 위트와 풍자 가득한 작품을 선보였으며, 또한 예술 장르 간 경계를 의도적으로 무너트리고자 연극과 음악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이다.
조금 더 그의 작업방식을 언급해 보자면, 가볍고 유연한 수채물감이나 잉크와 드로잉에 많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미술재료부터, 장난감, 피규어 그리고 키치스러운 오브제나 물질들이 그의 일반적인(?) 드로잉의 도구가 된다. 이것은 해체하고 재결합하기도 하고, 관람자가 이상홍식 드로잉 행위에 직접 개입하도록 유도하는 그만의 독특한 화법을 고수해 왔다. 따라서 재료 선택부터가 이상홍의 작업은 시작이 되고, 시니컬하게 던지는 것이 이상홍의 화법이다.
그는 항상 자신의 드로잉을 소개할 때 ‘이종격투기’와 같은 <조형드로잉>으로 소개하는데, 이는 ‘드로잉’을 단순히 평면 위에 선으로 표현된 시각물에서 벗어나 ‘드로잉’이라는 행위 자체를 확장된 시각으로 해석하고, 드로잉을 기반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과 실험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서울드로잉클럽> 전시기획과 출판, <홍살롱> 공간 운영, 극단 <두비춤>의 창단과 연극배우로서의 활동까지 그동안 꾸준히 달려온 그의 행보는 정체되어 있지 않은 특이성을 지니고 있기에, 부지런히 움직이고 상황을 예의주시해야 하는 이종격투기의 비유가 퍽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이상홍의 작업 흥미로운 지점은 이 전에 해온 ‘그리기’와는 다른 결이 나타난다. 스페이스몸미술관 제3전시장에 걸린 <ghost>를 비롯한 몇 개의 작은 회화는 제2전시장에 설치된 드로잉과 다르게, 아크릴물감을 사용하여 평소의 드로잉보다 재료의 두께가 생기는 두텁게 바른 그림이다. 세로로 긴 형태의 작은 틀에 반복적으로 선을 그어 쌓는다던지, 배경색을 입힌 후 다른 이미지를 올리면서, 추상적, 혹은 구체적인 형상으로 완성시킨다. 이 일련의 행위가 그에게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시간을 쓰고, 신중하게 한 번 쌓아 올린 물감의 층 위에 또 다른 색을 계속 축적시켜야 했을 것이다. 평소 그에게 불투명한 재료를 쓴 이미지의 중첩은 주로 색종이 콜라주 작업이었다. 그 외 즐겨 사용하는 수채물감이나 잉크에서 보이는 물감과 물감 사이의 겹침, 마치 반투명한 레이어들이 쌓여, 채도 높은 색을 만들어내는 재료의 물성을 사용해 온 것과 다른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재료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작업에서 부유하고 있는 이미지들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집중하고 명료하게 드러냈다면, 이번에 시도한 회화는 평면 위에 드러나는 붓터치와 물감의 질감이 가득 메워 관람자를 하여금 구상과 추상의 경계 사이에서 감상의 범위를 넓혀주는 것이다.
조이경은 주로 실물 혹은 사진을 촬영한 동영상을 영사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를 찢어 붙여 서로 성질이 다른 매체가 혼재된 상태를 사진으로 남긴 이 작업과 같이, 사진, 영상 등 미디어 매체와 회화재료 등 물질성 강한 전통 매체의 혼합과 중첩하여, 재생산하거나 재해석된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이는 매체의 홍수 속에서 혼재된 기억과 경험들이 기호화되어 화면 안에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전의 방식과는 다르게 물감이 가진 물성만 오롯이 화면 안에 남긴 <The Colour of Paint_ing>를 선보인다. 이 시리즈 작업은 마치 얇은 피부껍데기나 얇은 표피같이 굳은 물감의 막을 캔버스 위에 콜라주 하여, 추상적이고 패턴화 된 이미지를 제작한 것으로, 이 전에 주로 사용한 사진과 영상작업은 배제한, 오롯이 물감이라는 재료의 특성을 사용한 회화 작업을 했다.
보통 굳지 않은 물감을 원하는 색으로 조합하고, 캔버스나 종이 위에 머릿속에 상상하거나 시각을 통해 재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붓으로 찍어 바르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의 그리기 기법이다. 그러나 조이경은 물감을 평면 위에 사용하는 기존의 프레임을 전복시킨다. 즉 아크릴물감을 한 번이라도 사용했던 회화작가라면 한 번씩 마주하게 될 물감의 껍데기들은 재료라기보다는 폐기처분하는 쓸모없는 것이다. 독특한 패턴으로 캔버스 위에 한 조각씩 배열하고 중첩하여 붙임으로써, 그 자체가 오브제이자 작품의 물성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매체만 달라졌을 뿐, 여러 매체들의 레이어가 겹치는 과정은 이 전 작업들과의 비슷한 맥락을 드러낸다.
아크릴물감이 가진 특징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은 스페이스몸미술관 제2전시장 가운데에 6색의 물감막이 매달려 있는 오브제이다. 얇은 고무막과 같이 보이는 물감의 표피는 전시장 중심에서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상태로 설치되어 다른 작품과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시각 저 끝 너머, 다시 예술
회화의 세계를 탐험하는 세 작가의 ‘지금, 여기’ 전시가 청주의 대표적인 사립미술관 중 하나인 스페이스몸미술관에 개최한 것은 어찌 보면 기획자와 미술관 관계자의 탁월한 선택이자,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스페이스몸은 201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청주미술사의 한 역할을 담당해 온, 지분을 가진 미술관이다. 지역의 미술관이지만 지역을 초월한 스페이스몸만의 개성이 도드라지는, 독특한 성질을 가진 미술관이다. 스페이스몸 제2전시장이 처음 개관했을 때, 지역에서는 기존의 화이트큐브에서 벗어난 노출콘크리트 형태의 거칠지만 주변 자연과 조화로우며, 작가들에게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가능하게 하는 특이점을 가진 공간으로 놀라움과 신선한 자극을 준 공간이다. 따라서 청주의 외곽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음에도, 그동안 지역을 비롯하여 국내 많은 미술인들의 많은 주목을 받아온 공간이다.
그러나 서울을 비롯한 여타의 도시들이 그렇듯 작금의 미술생태계는 언제나 불안정하다. 특히 독립적으로 활동해 온 미술공간과 잠깐의 공모와 기금선정, 부업으로 연명해 나가는 예술가들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해 왔기에, 지역미술계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지금의 공간과 예술인들이 생존하기에는 벅차며, 아직까지도 소수의 취향과 향유로 인식되고 있는 작금의 간극이 좁혀지거나 변화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득한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에, 우리의 삶에 예술이 당신과 함께 있음을 지역의 생태계와 예술가와의 관계를 형성하고자 실천하는 빈공간의 기획자이자, 화가인 박해빈과 고군분투하는 예술가들의 활동과 갈망은 소리 없는 격투이자 투쟁과 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의 현실을 넘어 그 ‘이후’를 기대할 수 있는 여지로 둘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