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라온 환경이 그랬듯, 나는 본래 아주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연애, 이성문제에 있어서 특히나 더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였는데 이런 내가 30대에 진입하고 나서 무려 '소개팅 어플' 그 험난한 도전을 하게 된 것이다.
원래 내 글은 사건(이라 쓰고 소개팅으로 읽는다) 순서대로 소개남들을 써 볼 예정이었는데 이제 누가 누군지 기억도 잘 나지 않고, 기록하는 대로 호수를 매겨 보겠다. 그래서 이번 소개남은 2호다. 바로, 가장 최근 만난 따끈한 소개팅 썰.
2호남. INFJ 남
며칠 전에 만난 가장 기억이 선명해야 할 소개남인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결국 겨우 기억해 낸 MBTI를 붙여봤다. 만난 순서로 따지면 10-20호 사이 어디쯤일 텐데, 내 2호남으로 기록되고 있다. 슬프게도 정말 임팩트가 없다. 특이한 점은 '가치관 소개팅'이라는 컨셉을 가진 소개팅 어플로 만난 분이라는 점? 그마저도 두 번째 만남이다. 이미 한 번 만나본 이후, 그냥저냥 한 기분으로 가게 된 소개팅 자리였다. 이젠 처음 소개팅만큼의 설렘이나 긴장은 없고 '제발 정상인이어라' 하는 마음만 남게 되어버렸달까...
처음 대화는 나름 순탄했다. 어플 특성상 그냥 잠수 타 버리는 사람, 급발진하는 사람, 메시지만으로도 어딘가 나사 빠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 와중에 사진도 꽤나 멀쩡해 보였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데 있어서도 꽤 적극적이었다. 그렇게 앱으로 대화를 나누다 카톡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사실, 일반 소개팅 같았으면 장소와 시간만 정하고 그날 다시 연락을 하든가 했을 텐데 너무 아침저녁으로 연락이 오니 조금 부담스럽고 다소... 귀찮기도 했다. 별 기대가 없었던 탓일까 아님 너무 일방적인 연락 때문인지 할 말도 없는데 계속 연락을 하고 나는 억텐으로 맞춰줘야 하고... 이걸 반복하다 보니, 나 연애해도 이렇게 귀찮으려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후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불편을 느끼거나(AKA. 쎄함) 구체적으로 설명은 어려운데 기분이 묘하게 더럽(?)다면 그냥 멈추는 것을 추천한다. 숙련된 쎄믈리에로서 그것은 온 우주의 기운이 그 사람은 아니라는 신호를 주는 것이니까!
퇴근 후 만나기로 한 소개팅 당일 날, 퇴근이 늦어져 좀 늦는다고 톡을 보냈다. 근데 보통 이런 경우 '천천히 오세요' 라든가.. 물론 늦은 내 잘못이지만, 지금까지의 소개남에게서는 꽤 매너 있는 답을 받았었는데, 이 분은 '얼마나 늦으세요' 라고 보냈다. 여기서 살짝 멈칫했지만 내가 늦은 거니까 최대한 사죄를 하며 한 10분 정도 늦을 거 같다고 보냈다. 그랬더니 무슨 버스를 타고 오냐고, 어디서 내리냐고... 하 이번 소개팅 애초에 기대도 없었지만 조졌네 싶었다. 지금 생각해도 굳이 왜 약속을 잡았을까 싶다. 본인 피셜 키 175였지만 나는 171 정도를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쯤 돼 보였고, 내가 선호하는 직군도 키도 그렇다고 학벌도 아니었는데 나는 대체 왜. 많이 공허했던 걸까.
불행 중 다행은 식당을 꽤 괜찮은 곳으로 골라 음식은 맛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웃기긴 한데 소개팅 자리에서 음식을 그렇게 빨리 흡입한 건 또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되게 왜소하신 분이었는데 입맛이 별로 없어 보이셨다. 그냥 우리의 모양새는... 망한 소개팅, 딱 그 모습이었다. 나도 맘에 안 들고 상대도 그닥이고. 앉자마자 본가가 어디냐고 물어서 표정관리에 실패할 뻔했지만 어차피 망한 소개팅 짧게 얘기해 주고 나는 되묻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바로 집으로 갈 줄 알았는데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해서 1차 당황. 아마 식사는 본인이 내겠으니 나보고 커피값이라도 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내가 너무 꼬인 걸까^^...
여차저차 만남이 마무리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평소보다 더 큰 현타가 왔다. 보통, 나는 상대가 맘에 드는데 상대는 그렇지 않을 경우 현타와 감정의 늪에 빠지는데 이날은 가뜩이나 기대가 없었는데 그 이하였기 때문에 타격은 없었지만 그냥 언제까지 이런 만남을 해야 내 짝을 찾는 것일까... 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번번이 실망뿐인 만남을 지속하니까 감정 소모가 너무 크고 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느낌이었다. 외로울 때 사람 만나는 거 아니라더니 역시 아닌가 보다.
집에 와서도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 하루였다. 차라리 혼자 자기 계발을 하든 운동을 하든 나를 위해 쏟는 시간은 현타가 없는데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행위는 크고 작은 현타를 남긴다. 이젠 누굴 새로 만나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갑갑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냥 혼자 살아버릴까 대뜸 맘을 먹다가도, 하얀 머리 되어서도 손잡고 산책하는 노부부가 되고팠던 내 어릴 적 로망이 떠올라 서글퍼진다.
여러분 저 됐어요! ㅈ됐어요! 샤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