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을 잡아라~!

동심을 찾고픈 어른 제국의 역습

by 사색가 연두

대한민국 성인들이 가장 못 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아무것도 안 하기’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 없이 놀기’다.


그런데 최근 내 상식을 뒤엎는 광경을 유튜브에서 목격했다. 화면상에선 주말 저녁 공원에 모인 성인들이 서로를 향해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뭘 저렇게 유난스레 하나 싶었는데, 이유는 황당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다 큰 어른들끼리 모여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 심지어 요새는 이게 '유행'이란다. 더욱 신기했던 건 평소에 친한 동료 혹은 친구와 함께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젠 아예 서로 몰랐던 사람들끼리 모여 아이들처럼 뛰어논다는 사실이었다.


이 나라에서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다 큰 어른들이 경찰과 도둑을 하는 것도 모자라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한다고?


그럴 리가 없다며 헛웃음을 짓고선 영상을 내리려던 찰나, 왠지 모를 묘한 호기심이 내 발목을 잡았다. 당장 왼쪽 뺨 한대를 친다. 정신 차리라고. 아무리 그래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술래잡기를 한다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재밌게 노는 성인들


고백하겠다.


그 비논리적인 유희에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바로 나였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경과는 이렇다.


학교 커뮤니티에 한 게시글이 올라왔다. 익명의 누군가가 새해를 맞이하기 전날 같이 모여서 경도(경찰과 도둑의 줄임말)를 할 사람을 찾는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나는 30초간 진중한 고민을 했고, 결국 댓글을 남기며 참여 의사를 밝히고야 말았다.


당시 커뮤니티 글


그리고 대망의 2025년 마지막 날이 밝았다. 살을 에듯 불어오는 칼바람은 여간 독한 게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따뜻한 방구석을 뒤로하고 이 추위에 '경찰과 도둑'이라니 제정신인가 싶었다.


하지만 차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일과를 마치자마자 칼바람이 귀를 찢고 손등을 물어뜯는 길을 나섰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아... 그냥 집에서 쉴걸." 하는 욕망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지만, 지독한 의무감 하나로 버티며 목적지를 향해 꾸역꾸역 몸을 밀어 넣었다.


해당 장소로 도착하니 나를 포함한 8명의 친구들이 이미 모여서 몸을 풀고 있었다. 나는 머쓱한 채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조용히 구석에서 혼자 몸을 풀었다. 평소 내향적인 사람이기도 하고, 이렇게 커뮤니티를 통해 사람을 만나본 것은 살면서 첫 경험이기도 했기에 내심 두려움이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모여 앉아 쉬는 사진


괜한 두려움이었다. 그 견고했던 어른의 가면이 벗겨지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듯 뛰어댔고, 살을 에는 칼바람은 오히려 시원한 청량제가 되었다. 나는 언제 귀찮아했냐는 듯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운동장 구석구석을 미친 듯이 휘젓고 다녔다.


그렇게 우리는 얼음땡, 허수아비 놀이, 수건 돌리기 등 여러 놀이를 병행했다. 기억의 서랍 속에 처박혀 있던 놀이들이 하나둘 소환될 때마다 운동장은 거대한 타임머신처럼 느껴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시곗바늘은 밤 9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고, 그제야 우리는 끊어질 듯한 숨을 몰아쉬며 차가운 운동장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까만 밤하늘을 보니 어릴 적 생각이 문득 났다. 나는 주말이면 항상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곤 했다. 왜냐하면 주말에는 어린이집을 가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조금 더 빨리 놀고 싶은 마음에, 평일엔 엄마가 그렇게 흔들어대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상하리만큼 주말에는 눈이 일찍 떠지는 탓이었다.


놀이는 어린아이의 상징이자, 어른들의 상실이다. 어렸을 땐 비가 오면 하늘은 온몸을 적시는 샤워기였고 온 세상이 워터파크였다. 물 웅덩이에 한가득 꿈을 품고 양말이 젖든 말든 밟아댔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비가 오면 괜히 기분이 꿀꿀하고 몸이 축 쳐진다. 무엇보다도 본인은 우산을 들고나가기가 가장 귀찮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상실한 걸까?


니체는 인간 정신의 성숙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는 인내의 '낙타'. 기존의 가치에 저항하며 자유를 쟁취하려는 '사자'.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놀랍게도 '어린아이'다. 그는 말했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이자 놀이이며, 스스로 돌아가는 바퀴다."


어린아이는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의 놀이에 온전히 빠져들어 삶을 긍정하는 신성한 기분만을 느낄 뿐이다. 오늘 밤, 운동장을 뒹굴던 나는 낙타처럼 의무를 짊어지지도, 사자처럼 으르렁대지도 않았다. 그저 잡고 잡히는 이 단순한 규칙 속에서 완벽하게 몰입하는 어린아이였다. 놀이는 이처럼 순간에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신성한 마법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인간은 '안식'의 상태에 빠질 때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안식의 상태란, 쉽게 말해 '나'라는 존재를 잠시 비워둔 채 순간에 몸을 맡기는 일이다. 어렸을 적 주말에 일찍 일어나 TV를 켜고 아무 걱정거리도 없이 만화를 보던 그 기억이 내겐 행복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잠자리 채를 들고서 곤충을 잡으러 뛰던 일이 내겐 행복이었다.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외치셨던 해 질 녘 노을에 기댄 목소리 또한 내겐 행복이었다.


다 큰 성인이 무슨 경찰과 도둑이냐고?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망각'하는 능력을 얻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오늘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에 몰두한다. 물론 좋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고 그에 기반한 생각일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도, 잡을 수도 없다. 그런데 시간에 얽매여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놓치고 살아왔는가? 당신 주위의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고 걸어왔는가?


오늘 나는 땀범벅이 된 채 깨달았다. 삶이라는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스스로 돌아가는 바퀴가 되어 춤추듯 노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고귀한 낭만중 하나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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