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노동의 가치
비상사태다.
통장의 생명력이 다했다.
통장 앱을 켜보니 찍혀 있는 숫자는 단돈 8만 원 남짓. 아무리 보아도 이번 달 생활비를 유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미래에 투자한답시고 이것저것 질러댄 게 화근이었다. 막상 잔고가 바닥을 치니 그제야 현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하지만 익숙하다. 늘 그래왔으니까. 부족한 생활비를 몸으로 때워 메우는 건 내게 낯선 일이 아니었다. 마침 머리만 쓰느라 온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나는 이것을 '위기'가 아닌 '기분 전환'이라 부르기로 했다.
자, 오랜만에 땀 냄새나는 노동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보자고.
일단 당근마켓으로 접속해 단기 알바를 뒤져보았다. 원래는 쿠팡 일용직을 많이 이용했는데 이번엔 조금 다른 일을 해 보고 싶어서였다. ‘당근알바’ 탭을 누르자 누군가의 노동력을 급하게 찾는 문구들이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투박하고도 강력한 한 줄이었다.
[급구] 행사 준비 쉬운 상하차 / 초보 환영 / 일급 당일 지급
'당일 지급'
그 네 글자가 주는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성스러운 알바는 복잡한 면접도, 자기소개서도 필요 없다. 요샌 직장 하나 구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험을 거쳐야 하는가. 이제 취업을 앞둔 시기의 나이인 내 주변 친구들의 동공엔 다들 영혼이 빠져있다.
하지만 노가다는 건강한 사지와 성실한 땀방울만 있으면 된다. 그 정직한 조건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주저 없이 나이와 성별, 그리고 신체스펙을 작성한 뒤 '지원하기' 버튼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답장이 돌아왔다. "일요일 오후 1시까지 OO로 오세요."
거래 성사다. 나는 옷장을 뒤져 구석에 박아둔 트레이닝복을 꺼내 들었다. 꾸깃꾸깃하게 주름지어진 옷을 오랜만에 꺼내드니 슬슬 벌써부터 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흙먼지가 묻어도 아깝지 않을 옷, 땀에 젖어도 금방 마를 옷. 그것은 마치 전투를 앞둔 전사가 갑옷을 챙겨 입는 비장한 의식과도 같았다.
그리고 당일, 나는 출근 시간에 맞춰 길을 나섰다. 맑은 햇살 아래 산뜻한 바람이 딱 일하기 좋은 날씨였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하자 낭만적인 풍경은 순식간에 지워졌다. 공기부터가 달랐다. 곧 있을 대형 행사 때문인지, 현장은 이미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였고 그들의 빠른 발걸음에서 오늘 하루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 큰일 났다...
나의 첫 임무는 트럭에 실린 가구들을 하차하는 일이었다. 가구들의 사이즈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아직 파릇파릇한 20대의 젊은 몸은 현장에선 정말 큰 무기다. 나는 곧바로 단단히 마음먹고 현장 지시에 따라 물건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문제는 준비하는 행사의 규모가 꽤 컸던 탓에 물건들이 쉬지 않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하긴 일당이 만만치 않았기에 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나는 마음을 비운 채 스스로 감정을 지운 로봇이 되기로 했다. 이런 건 원래 생각하는 순간 지치기 마련이다.
그때였다. 무아지경으로 박스를 나르고 있을 때, 소음 사이로 다급한 외침이 귀에 꽂혔다.
"헤이~ 총각! 이리 와 봐요!"
고개를 돌리니 이국적인 이목구비의 중년 남자가 손짓하고 있었다. 짙은 눈썹과 굵은 뼈대, 얼핏 보니 튀르키예 쪽에서 온 분처럼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니 그가 자기 일 좀 도와주라고 불렀던 것이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나선 지 불과 몇 걸음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압도적인 광경 앞에서, 나는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저씨가 안내한 부스 앞에는 그야말로 '직물의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여러 카펫들이 돌돌 말린 채 트럭 안을 꽉 채우고 있었는데, 아마 총 합쳐서 100개 정도의 카펫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게 다 뭐냐고 물어보니 '페르시아 카펫' 또는 넓은 의미로 '오리엔탈 카펫'이라고 불리는, 튀르키예나 이란과 같은 중앙아시아에서 주로 널리 쓰이는 카펫이라고 한다.
압도적인 물량 앞에 한숨이 나와야 정상이었겠지만, 내 입에서 먼저 터져 나온 건 탄성이었다. 조명도 없는 트럭 안에서도 카펫은 스스로 빛을 내는 듯했다. 촘촘하게 수놓아진 기하학적 무늬와 색감에서 한 땀 한 땀 지어 올린 장인의 숭고한 시간이 읽혔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도 잠시 노동의 공포와 불쑥 밀려왔다.
"이거... 다 옮기면 되는 거죠?"
내 떨리는 질문에 아저씨는 사람 좋게 웃으며, 동시에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스. 전부 다 꺼내면 돼."
저게 무거워봤자 얼마나 무겁겠냐 싶겠지만 정말 무겁다. 특히나 내 키에 두세 배 정도 되는 크기의 카펫도 있었다. 나 포함 총 3명의 남성이 일을 했고, 하자를 다 끝내는 데 대략 2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 이후 아저씨가 준 카드로 근처 편의점에서 이온음료를 마시며 10분 정도 쉰 뒤, 우리는 다시 현장으로 들어가 물건들을 보기 좋게 세팅하고 부스를 완성했다.
완성된 부스는 그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였다. 카펫들의 아름다운 기하학적 무늬는 정말 여느 부스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풍스럽고 황홀했다. 땀에 젖은 내 눈에만 예뻐 보인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우리쪽 부스를 쳐다보며 사진으로 담기 바빴다. (나는 힘들어서 찍을 생각조차 못했다...)
일이 다 끝난 뒤, 약속대로 일당 지급을 곧바로 받았고 현장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역시 사람은 몸을 써야 살 맛이 나는 듯하다. 노동이란, 결실을 맺는 과정의 연속이다. 어쩌면 우리 삶과도 정말 많이 맞닿아 있지 않은가.
과거에 노동은 신이 주신 은총이자 명령이었다. 이후 근대 자본주의로 들어서면서부턴 공리주의적인 차원에서 국가를 위한, 국민의 신성한 의무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자산가치가 불어나는 속도에 비해 노동으로 받는 임금 상승의 속도가 턱없이 느리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는 그렇다.
그마저도 지금은 AI 시대가 아닌가. 앞으로 AI와 휴머노이드가 노동시장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에 대한 불확실성에 사로잡히면서 많은 사람들은 불안 속에 젖어들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우린 점점 노동의 가치가 줄어들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게 마냥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거대한 사회의 흐름, 즉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본다. 우리는 이 거대한 변화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가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미성숙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서로의 직업과 연봉을 비교하며 급을 나누기 바쁘다. '그 나이 먹고 몸 쓰는 일 하냐'는 비아냥이나, '가성비 떨어지는 노동'을 패배로 규정하는 시선들은 2026년에도 여전하다. 이건 교육의 문제다. 이미 이 사회는 우리가 지금껏 당연하다고 여겨온 모든 것이 뒤틀리고 있다. 블루칼라 직종이 다시 떠오를 것이라곤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좋은 대학에서 좋은 직장으로 가는 보편적인 루트는 더 이상 효율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으며, 오로지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강요한 사회는 사랑과 공존이 아닌 되려 혐오와 배타를 가르쳤다.
이젠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만 한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과연 그러한 비교가 큰 의미가 있을까?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노동'은 과연 어떤 의미를 주는가?
모든 것이 효율적이어야 하고, 매 순간이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그 기능이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가차 없이 '도태'와 '실패'라는 낙인을 찍는 이 사회가 과연 건강한 것일까? 우리는 잊고 있다. 어떤 꽃은 봄에 피지만, 어떤 꽃은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망울을 터뜨린다는 사실을. 그것은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 결코 '능력'의 부재가 아님에도 세상은 기다려줄 인내심을 잃어버렸다. 타인의 삶에 함부로 가성비의 잣대를 들이대며 냉소를 보내는 사람들을 보라. "그 나이에 왜 그러고 사냐", "그건 비효율적이다"라며 혀를 차는 그들의 얼굴은 얼핏 우월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건조하기 짝이 없다.
사실 노동에 대한 나의 이 유별난 존중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내 아버지가 현장의 노동자셨다. 주말이면 어머니는 나와 동생의 손을 잡고 아버지가 계신 현장을 찾곤 했다. 덕분에 나는 정말 어린 나이에 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현장이 얼마나 치열한 전쟁터인지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보며 자랐다. 내 눈엔 그들은 전사였고, 멋있는 수퍼맨들이었다.
영국의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라는 저서에서 생명이 곧 부라고 말했으며, 건강한 육체로 일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 자체가 '신성한 예술이자 생명력의 발현'이라고 예찬했다. 그가 당시의 주류 경제학(돈과 이익만 따지는 자본주의)을 맹렬하게 비판하며 쓴 책인데, 물론 현대에 들어선 고리타분한 소리일지도 모른다. 이미 노동의 형태는 많은 변화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해도 삶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노동을 통해 숨 쉬고, 노동을 통해 살아간다. 그러므로 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땀방울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누군가는 우리가 밟고 서 있는 도로를 깔고, 누군가는 매일 쓰는 생필품을 만들며, 또 누군가는 새벽을 가르며 물건을 배달한다.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안락한 일상은 단 하루도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이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움직이는 그들의 헌신 덕분이다. 그러니 쾌적한 사무실 책상에 앉아 펜대만 굴리는 이들이, 감히 그들의 땀 냄새를 조롱하거나 무시할 명분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자신의 발밑을 지탱하는 땅을 비웃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오만이다. 결국엔 망치가 지어놓은 건물 안에서야 비로소 펜대도 굴러갈 수 있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