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니 동심이 생각났다.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구름이 해를 집어삼키더니, 이내 빗줄기들이 땅바닥을 향해 사정없이 처박히기 시작했다. 창틈을 타고 비릿한 흙 내음이 스며들었다. 오늘 계획했던 산책길에 커다란 흠집이 난 기분이었다. 갈아입다 만 옷을 대충 방 한 구석 던진 채 소파에 몸을 던지고 TV를 켰다. 모처럼 쉬는 날이라 혼자서 밖을 좀 돌아다니며 마음의 환기를 좀 시킬까 했는데, 이 모든 계획이 어긋나자 모레성처럼 의욕이 바스스 무너져 내렸다. 무심코 켠 날씨 앱에는 일주일 내내 '흐림'과 '비'라는 우울한 예보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완전히 무기력해진 채로 빗물의 두드림만을 들었다.
젖어드는 옷자락이 피부에 닿는 느낌이 끔찍하다. 번거롭게 우산을 들고 다니는 일도 마뜩잖다. 무엇보다 우산이라는 얄팍한 지붕으로 하늘을 가린 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싫다. 왜 이토록 싫은 것들 투성인지 소파에 가만히 앉아 곱씹어 보았다. 글쎄다. 싫은 이유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
문득 '흐림'이라는 단어는 왜 긍정보다 부정을 먼저 소환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옛사람들은 비를 갈구하며 기우제까지 지냈다는데, 현대의 나는 왜 그 축복을 번거로움으로만 치부하게 된 걸까. 내가 비를 싫어할 이유야 차고 넘치지만, 정작 '왜 싫어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이 거부감을 비켜나, 비를 좋아해 볼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그때, 창밖에서 빗줄기를 뚫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비 오는 날에도 거침없이 뛰어다니는 저 생명력이라니. 저 나이 땐 대체 어떤 심장을 가졌기에 지치지도 않고 온 동네방네를 뛰어다녔을까. 아이들의 소란을 신호탄 삼아, 잊고 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문득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시절 내게 비는 번거로운 기상 현상이 아니었다. 하늘은 온 세상을 적시는 거대한 샤워기였고, 발 닿는 곳마다 펼쳐진 워터파크였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는 그 자체로 꿈을 품은 작은 바다였기에, 운동화가 진흙탕에 절여지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등 뒤로 쏟아지는 어른들의 걱정 섞인 잔소리는 빗소리에 씻겨 내려갔고, 나는 그저 비라는 이름의 장난감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놀이터의 주인공이 되었다.
맞아, 그땐 비마다 얼굴이 달랐지.
낭만주의 시대의 철학자들은 자연과 자아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갈구했다. 특히나 그들은 비가 내릴 때 그 특유의 고립감을 사랑했다. 외부 세계가 가려질 때 비로소 내면에서의 풍경이 더욱 또렷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비 오는 날의 산책이나 창 밖의 풍경은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비를 사랑했다.
하지만 현대인들 중 대개는 비 오는 날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10명 중 2명 정도는 좋아할까? 어쨌든 내 주위에선 거의 보지 못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가 오는 날씨는 많은 업을 정체시키는 장애물 같은 요소일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모든 가치는 '흐름'과 '속도'로 측정된다. 물류는 멈추지 않아야 하고, 출근길은 막히지 않아야 하며, 의상은 늘 깨끗해야 비즈니스적 예의다. 비는 이 매끄러운 효율성의 세계에 '마찰'을 일으킨다.
그렇지 않은가. 농경 시대에 비는 생존을 위한 '축복'이었으나, 콘크리트 정글의 현대인에게 비는 그저 세탁물이 마르지 않는 불편일 뿐이다. 기우제를 지내던 시절의 인간은 자연과 합일, 즉 동기화되어 있었지만 지금의 우리는 자연과 비동기화된 환경에서 지내고 있다. 이는 상당 부분의 정서적 여유를 박탈시킨다. 현대인이 비를 싫어하는 이유는 비라는 '타자'를 내 삶 안으로 받아들일 여유를 잃어버렸다. 반면에 어렸을 적 내가 비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산이라는 경계 없이 온몸으로 비를 환대했기 때문이다.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이었던 노발리스의 관점에서 비는 우리의 일상을 방해하는 '흠'이 아니었다. 분열된 하늘과 땅이 뜨겁게 재회하는 우주적 결합이며, 거칠고 메마른 현실을 마법 같은 신비로 되돌리는 낭만의 과정으로 보았다. 비 오는 날의 무력감에 젖어 소파에 머물고 있는 나의 정지는 결코 정체된 시간이 아니다. 그러니 비는 내게 무한한 우주를 탐험하라는 자연의 초대였다.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던져 놓았던 옷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현관문 앞으로 가 우산을 꺼내 들었다. 비 오는 날에 산책가 본 적이 얼마만일까. 사실 기억도 잘 나질 않는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빗소리 속에서 책을 읽는 건 또 좋아했던 나였다. 뭐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물에 대한 인식은 달라지기 마련 아닌가. 우리의 뇌는 거기에 아주 특화되어 있다. 결국 비라는 객체는 변함이 없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시선'이 풍경의 색채를 결정한다.
밖으로 나서니 바람을 탄 비가 얼굴 표면에 매섭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귓가를 톡톡 건드렸다. 빗소리를 누군가는 신경을 긁는 소음으로 처리하지만, 누군가는 영혼을 다독이는 백색소음의 안식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우리의 뇌는 수집된 감각 데이터를 그대로 투사하는 거울이 아니라, 저마다의 맥락을 투영해 자신만의 세계를 빚어내는 조각가에 가깝다. 그리고 그 세계를 조각하는 정(釘)을 쥐고 있는 주체는, 언제나 변함없이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