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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아 Dec 14. 2023

[그 남자] 당신 앞에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에 우울증 치료를 했어요. 아직도 끝이 난 건 아니에요. 언제 다시 약을 먹어야 할지는 몰라요. 그리고, 정신과에 입원치료도 한 달 했었어요

내가 태어나는 바람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내 탓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아버지는 그런 나의 존재가 힘드셨던 모양이다. 먼 길을 떠나버리셨고, 나는 할머니손에 자라야만 했다. 10살 즈음 아버지의 재혼 소식을 들었다. 혹시 나를 데리고 가시려나 기대했지만 나는 여전히 할머니와 사는 아이였다. 할머니는 가난했다. 나는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작성한 사유서 덕분에 간신히 학교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출생부터 비롯된 고통은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했다.

교실에서는 언제나 혼자였고, 직장에서는 사무실의 대표 싸움닭으로 긴 시간을 버티어왔다. 살았다가기보다는 버티어왔다는 표현이 훨씬 적절하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보다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4살 여름 기침이 심해 가정의학과를 찾았다. 진료를 마친 의사는 나에게 우울증 약을 권하였지만 나는 기침약만 받아 나왔다. 그리고 24살 화창한 어느 날 대학병원 정신과 전문의를 만나고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다. 감기약을 먹듯 일주일이면 끝날 것 같았던 우울증 약은 끝나기는커녕 약의 개수가 점점 늘어나더니 30살 즈음에는 입원치료까지 해야 했다. 이 긴 어둠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그 어려움을 완전히 이기지는 못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불안한 가정환경에서 생활했던 나는 일찍이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그러나 34살이 되던 해까지 결혼을 하지 못하였고, 그해 7월 이제는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첫 만남부터 우리는 서로 호감이었다. 세 번째 만남부터는 서로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나의 마음이 커질수록 그 사람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할 말이 있어요"

"이야기해요"

"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에 우울증 치료를 했어요. 아직도 끝이 난 건 아니에요. 언제 다시 약을 먹어야 할지는 몰라요. 그리고, 정신과에 입원치료도 한 달 했었어요"

"......"

"미안해요"

"내가 당신 앞에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요. 앞으로 내가 당신의 오빠가 되어주고, 아빠가 되어줄게요"

내가 얼마나 하찮은 삶을 살아왔는지 알면서도 나를 받아들여 주며, 함께 나아가자고 말해주었다. 그 순간 나는 진정한 사랑을 느꼈다. 더 이상 그 사람과의 결혼을 늦추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만난 지 불과 일주일 밖에 안되었지만 그는 나를 지지해 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상견례를 하러 갔다. 그날은 정말 특별한 날이라서 함께 와인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어요"

그러자 그 사람이 나를 안아주었는데, 그 사람의 눈물이 나의 얼굴을 적셨다.

"당신이 살아오면서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겠다."

정말 귀한 순간이었다. 그 눈물은 나에게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내 힘듦을 공감해 주는지 보여주었다.

서른네 살 그날 우리가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 상상도 하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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