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펙트 데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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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_2024__★: 5/5
한줄평: 등잔 밑 숨어있는 음미와 찬미
인간의 욕구 5단계설로 유명한 심리학자 에이브러험 메슬러는 환자들에게 '절정'을 경험하는 훈련으로 몇 시간 동안 꽃을 응시하게 했다.
훈련의 핵심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꽃을 보며 자신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인식하는 데에 있었다.
이를 통해 메슬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평범한 일상에서도 극도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뇌리 어딘가 녹진하게 남아있는 퍼펙트 데이즈의 마지막 신이 떠오른다.
어쩌면 퍼펙트 데이즈를 보았던 관객은 메슬러의 훈련을 경험한 것일지 모른다.
두 가지 색으로 퍼펙트 데이즈를 이야기하고 싶다.
무슨 색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난 항상 보라색과 초록색을 말한다.
그 색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색을 감상하는 재주가 없는 난 좋아하는 색이 아닌,
관련 문장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두 문장을 고른 것이다.
초록을 색이라 부를 수 없다 이것은 격돌이다. - 존 러스킨
나는 마침내 대기의 진정한 색을 발견했다. 신성한 공기는 보라색이다. - 모네
글귀가 멋져서만 이 아니라 경험을 통한 공감을 느껴서다.
한때 식물을 키웠다.
씨앗을 심으면 어떤 것은 3일 만에 싹이 트고 어떤 것은 10일이 지나도 싹트지 않는다.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알지만, 싹이 흙을 헤집고 나오는 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서, 발아할 기미가 보이면 화분에 귀를 가까이 대기도, 오랫동안 화분을 응시하기도 했다.
이 좁은 단칸방에, 햇빛도 잘 받지 못한 것이 기를 쓰며 젖은 흙을 뚫고 피어나는데,
어떻게 인간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시들 수가 있겠냐며 의지를 얻었다.
하지만 지금은 식물을 기르지 않는다.
무언가를 기르고 가꾸는 게 이제 너무 어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도 식물을 기른다.
하지만 그 식물들은 과거 내가 길렀던 식물들과 다르다.
히라야마는 자라나고 꽃피우는 모습을 기대하며 기르지 않는다.
하루하루 존재의 순간을 응시하고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 모습은 시기를 잃어도 포기하지 못하는 추태로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에 대한 존중을 토대로 일상을 음미하는 모습이었다.
새벽의 입구와 출구는 너무나 다르게 생겨 그것이 다음 하루로 향하는 같은 길인지 의심스럽게 한다.
한동안 입구에 머물던 나는 모네가 말한 신성한 대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잠들지 못하고 깨어있던 이유는 하루가 너무 아쉬워서였고,
하루가 아쉬웠던 이유는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해서였다.
지금 나는 출구의 초입에 서있다.
운이나 실력으로 건너온 것도 아니고 계획과 목표에 발맞춰 온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살다 보니, 어쩌다 보니 점점 새카매지는 새벽보다, 점점 밝아지는 새벽을 보는 날이 많아졌다.
때로 입구가 그립기 때문에 출구가 더 좋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모네가 말하는 신성한 대기의 색상이 보라라는 것에는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공감의 동기가 '그저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라는 이유는 퍼펙트 데이즈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닿아있다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은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해당 장면의 연기는 단순히 잘했다가 아니라
삶과 인생이라는 단어가 얼굴을 가진다면 지을 법한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생각하게 한다.
눈물과 환희가 모두 보였던 표정엔 씁쓸함과 감격, 즐거움과 버팀이 하나의 덩어리로 공존한다.
그 표정에서 나에게 가장 와닿은 것은 삶 전체를 향한 찬미였다.
퍼펙트 데이즈를 처음 볼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주인공의 과거는 대체 무엇일까?'였다.
때문에 수수께끼를 풀듯 영화 속 사물을 파헤치며 나름의 해답을 찾았다 믿었다.
이것이 영화를 관람하는 잘 못된 방향이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작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사이,
나는 퇴행으로 느껴지는 전진을 하며 앞서 말한 좋아하는 색의 의미에 한 걸음 다가섰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퍼펙트 데이즈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꽃을 응시하게 했던 메슬러처럼 그저 삶을 응시하며 변화하는 나의 감정, 나아가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일상에서의 기쁨을 누리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평선만 바라보며 걷는 사람은 주위에 피어난 아름다운 것들을 못 본다'는 말을
과거엔 투지 없는 사람의 여유, 패배자의 자기 위로쯤으로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 삶을 살아가다, 다시 영화를 곱씹어 보니
어쩌면 저 말에 조금은 공감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투지 없는 패배자도 삶을 음미하고 찬미할 수 있다는 것,
계속해서 자신을 가꾸고 신성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영화가 나에게 건네는 선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