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그린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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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나이트>_2021__★: 5/5
한줄평:운명 앞에 굴복도 저항도 모두 숭고하다
'영웅'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인가?
개인적으론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킬레우스가 떠오른다.
비록 자신이 이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을 알지만,
누구보다 용맹하게 전장을 하드캐리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 <트로이> 브래드 피트 비주얼이 더해지며..)
나는 아킬레우스처럼 할 수 없기에 그를 동경한다.
언젠가 죽으리란 건 알지만, 그 시점을 최대한 미루고 싶고 외면하고 싶다.
죽음이 너무 극단적이라면 사명 정도로 주제를 바꿔보자.
죽음을 무릅쓰는 아킬레우스가 아니라 전설이 되어 역사에 기록되기 위해 트로이로 향하는 아킬레우스로 바라보자.
그렇게 본다 한들 여전히 나는 아킬레우스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
전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울 것이고, 안락한 여생의 길이 있다면 향할 것이다.
1_여정의 시작
그린나이트의 주인공 가웨인도 처음엔 나와 다르지 않았다.
가웨인은 매음굴에서 처음 등장한다.
찬물을 얻어 맞고 화들짝 놀라며 깨어나는 가웨인,
그에게 세상은 향락과 두려움 사이 어딘가 어렴풋이 존재하는 곳이다.
자신의 신발을 끝내 찾지 못하고 맨발로 매음굴을 나서는 가웨인은 아직 운명의 여정을 떠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이다.
먼 미래에 기사나 영웅이 되어 전설로 남고 싶은 맹목적 목표가 있지만,
자신에겐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생각으로 느긋하게 삶을 즐긴다.
하지만 그가 치기(稚氣)로 그린나이트의 목을 베자,
넘쳐났던 가웨인의 시간은 고작 1년으로 줄게 된다.
대신 여정을 위한 준비물을 얻는다. 도끼와 허리띠.
그렇게 가웨인의 운명은 용기가 아닌 치기로 시작된다.
도끼는 가웨인이 운명의 문을 열었다는 증거이자 그 결말을 받아들이고 마무리할 결심의 상징이다.
그린나이트의 도끼가 가웨인의 목을 칠 때, 비로소 소년의 치기는 영웅의 용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서 왕과 함께 후대에 영원히 기억되는 기사로 남을 것이다.
허리띠는 따뜻한 가족의 품, 안전한 성채, 사랑하는 연인을 상징한다.
때로는 소박하고 때로는 애틋한, 계속해서 삶을 살아가게 하는 휴머니즘의 상징인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미래, 행복과 슬픔이라는 음양이 공존하는 여생의 띠이기도 하다.
2_도끼와 허리띠
가웨인은 여정을 나서자마자 이 두 준비물을 도적들에게 빼앗긴다.
포박되어 나무 밑에 버려진 가웨인,
카메라는 한 바퀴 돌며 앙상한 백골이 된 가웨인을, 다시 한 바퀴 돌며 어떻게든 살아보려 몸부림치는 가웨인을 보여준다.
비참한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손에 난 상처도 참아내며 온몸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다.
방황하던 가웨인은 잘린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자신의 잘린 목을 건져달라는 여인의 부탁을 받는다.
이후 가웨인이 호수에 몸을 던지는 장면은 일종의 세례식처럼 보였다.
중세 영어권 영화가 흔히 그러듯 <그린나이트> 또한 성경과 연결고리가 가득하다.
가령 그린나이트의 첫 방문과 그로부터 1년 후 다시 가웨인이 그린나이트를 조우하는 시점도 모두 크리스마스이다.
해당 장면에서 가웨인은 세례요한의 도움을 받아 물세례를 받은 예수처럼 호수에 몸을 던지고 여인의 목을 되찾아줘 그 대가로 잃어버린 도끼를 되찾는다.
물에 들어가기 전 가웨인은 여인에게 대가를 묻지만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결국 여인을 위해 몸을 던지는 기사도를 보인다.
대가를 알 수 없음에도, 또는 대가를 기대할 수 없음에도 행동하고 모험하는 것 그것이 운명의 시작임을 일깨워 준다.
가웨인은 성주 부인의 유혹 앞에 갈등하고 이 과정에서 허리띠를 되찾는다.
도끼가 상징하는 운명과 숙명처럼 허리띠가 상징하는 인생과 삶에도 베일 듯한 날이 존재한다.
가족, 친구, 연인, 공동체.
모두 좋은 단어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어긋날 때야말로 최악의 고통이 찾아온다.
이 양면성을 영화는 사랑으로 설명한다.
가웨인의 연인은 매음굴에 있고 간음의 유혹은 성주의 부인에게서 찾아온다.
우리는 사랑을 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매음과 간음 또한 인간이 저지른다.
옹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뒤틀린 사랑도 인간적인 것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처받는 이들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허리띠를 선택한 가웨인이 미래에 결국 애인을 버리듯 말이다.
가웨인의 허리띠에는 이 모든 의미가 담겨있다.
3_가웨인의 선택
그린나이트와 재회한 가웨인은 도끼를 그린나이트의 발치에 두며 운명의 결정권을 넘겼지만,
차고 있던 허리띠를 벗지 못하고 죽음 앞에 두려워한다.
이때 가웨인은 자신이 지금 운명 앞에서 달아난다면 이후 어떤 삶이 펼쳐질지의 미래를 마주한다.
미래의 생엔 행복도 있었지만 비통도 있었다.
바라던 기사가 되었지만, 쓰디쓴 몰락이 있었다.
소중했던 이들을 잃고 결국 곁에 아무도 없이 적들에게 목이 잘려 죽을 운명이었다.
지금과 다를 게 무엇인가.
그제야 가웨인은 허리띠를 풀고 그린나이트는 자신의 일을 한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현대에도 아킬레우스처럼 자신의 사명을 위해 몸과 정신을 다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
성직자, 진심으로 국민을 위하는 일부 정치인들, 간혹 뉴스에 등장하는 믿을 수 없는 선행을 베푸는 이들이 있다.
물론 사명이 권력, 명예, 돈인 이들도 있다.
나에게도 사명처럼 느껴진 분야가 있었고 치기인지 용기인지 몰라도 그 길을 걸으려 애썻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 버티기 힘들어 두려웠던 나는 허리띠를 풀지 못하고 길에서 달아났다.
때로는 후회도 되고 때로는 잘한 일이다 싶다.
개인적으로 가웨인도 더욱 많은 선택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트로이 전쟁 이야기 속 아킬레우스만큼 큰 비중을 가진 이가 또 한 명 있다.
바로 오디세우스이다.
오디세우스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가려 노력했고 그 과정에 치욕도 비통도 있었다.
하지만 끝내 이타카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았다.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는 서로 다르지만 둘 모두 위대한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운명 앞에, 사명 앞에 누군가는 도끼를 들고, 누군가는 허리띠를 잡는다.
또 어떤 이들은 도끼와 허리띠 사이에서 선택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도끼를 택하든 허리띠를 택하든, 어느 것도 택하지 못하고 있든 이 영화는 '어느 정도의 당신'을 충분히 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