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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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의 꿈>_2025__★: 4.5/5
누군가의 인생 전체를 멀찍이서 바라보면 그리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누구의 인생일지라도 공감, 연민을 느끼며 함께 웃을 것이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타인을 가까이서 느끼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정서 웰빙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영화는 이에 탁월한 매체이다.
<기차의 꿈>은 20세기 초 미국이란 숲에서, 한 그루 나무처럼 자라난 로버트 그레이니엄의 인생을 보여준다.그리고 그 나무에서 잘라져 나갔던 소중한 가지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한다. 이 영화는 상실 앞에 무력한 한 사람을 담았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그의 어린 시절을 설명하며 가장 처음 잘려나간 가지를 말한다.
그것은 '되돌아갈 곳'이다.
영화는 로버트의 부모가 죽은 건지, 혹은 아들을 버린 건지 알려주지 않는다.
로버트의 고향은 어디인지, 태어난 날짜는 언제인지 마찬가지다.
돌아갈 곳이 없기에 로버트는 방황한다.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기에 무언가에 관심 주는 것이 서투르다.
그렇게 그는 무색무취의 성인이 된다.
그에게도 행복한 순간이 찾아온다.
글래디스라는 여성을 만나면서다.
그녀의 입을 통해 로버트는 살아생전 처음으로 '감정이 담긴 자신의 이름'을 듣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여 보금자리를 만들고, 딸을 낳아 가정을 꾸렸다.
로버트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
어느 날 일터에서 돌아온 그는 산불로 인해 잿더미가 되어버린 보금자리를 목격한다.
로버트라는 나무에서 가장 커다란, 없어서는 안 될 가지가 무참히 베여나간다.
그는 재 위에 누워 실종된 가족들이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하염없는 기다림에도 가족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글래디스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글래디스 의견대로 가족을 데리고 일터에 갔다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일 것이다.
눈물을 흘리면 상실을 인정하는 것 같아 그는 모든 생각을 멈추고 그저 가족을 기다린다.
점점 메말라 가는 로버트를 보다 못한 동네 상점 주인은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두 사람 사이엔 자그마한 우정이 피어난다. 새로운 온기를 만나고 나서야 로버트는 가족의 상실을 인정하듯 눈물을 흘린다.
영화 속 로버트가 겪은 상실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동료, 죄책감, 일자리.
그는 가지치기 당하는 베인 나무처럼 세상에서 자신의 것을 천천히 잃어간다.
이 모든 상실의 원인이 혹시나 로버트 자신에게 있지 않을까 생각할 즈음, 영화 속 한 인물이 말한다.
죽은 나무도 산 나무처럼 가치가 있다고. 옳은 말이다. 죽은 나무는 집이 될 수 있고, 바다 위 배가 될 수 있고, 온 가족이 둘러앉는 식탁이 될 수 있다.
저물어가는 한 사람의 인생도 그러하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고, 힘이 될 수 있다.
설령 영화 속 캐릭터라도 말이다.
영화는 엔딩 시퀀스를 어느 때보다 역동적인 편집과 경건한 피아노 선율로 장식한다.
로버트가 인생에서 경험한 가장 특별한 순간을 관객에게 선물한다.
이 순간 로버트는 처음으로 세상을 호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지나온 나날들, 행복했던 순간과 행복을 상실한 순간을 한꺼번에 마주한다.
그리고 떠오르는 단어는 '아름답다'이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우리는 그의 삶을 아주 가까이 지켜보았기에,
그 짧은 순간 로버트를 스쳐 지나가는 오묘한 행복에 사무치게 빠져들게 된다.
또 그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소한 아름다움도 이 찰나에 누리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그리고 그 바램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관람 후 곱씹어 볼수록, 영화가 상실을 다루는 두 개의 방식에 탁월함을 느꼈다.
먼저 영화는 '상실' 그 자체를 강조하지 않는다.
다른 영화들처럼 '상실'의 순간을 부각하며 관객들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닌,
<기차의 꿈>은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는 로버트의 일생에만 집중한다.
작업 중 동료들에 의해 처형당한 중국인 인부로 말해보자.
기존 영화 표현대로라면 처형 직후 중국인 인부의 싸늘한 시체를 하이 앵글로 화면에 담았을 것이다.
비참한 죽음, 억울한 희생을 강조하는 장면으로 전형적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컷으로 로버트의 당황한 얼굴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기차의 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로버트의 아내와 딸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잿더미 속 그녀들의 시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인 양 시각적으로 그들의 죽음을 기리지 않는다.
형제의 복수를 위해 총살당한 로버트의 동료 또한 카메라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두 번째로는 상실의 '이유'와 '이후'를 설명하지 않는다.
중국인 인부가 끌려갈 때 로버트는 그가 왜 처형되어야만 했는지 끝내 알지 못한다.
가족의 상실 역시 마찬가지.
화재가 왜 일어난 건지, 가족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지 영화는 일절 설명하지 않는다.
형제의 복수를 위해 로버트의 동료를 죽인 흑인 또한 마찬가지다.
흑인은 그럴싸한 이유를 대며 로버트의 동료를 죽였지만, 그 이유가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은 마치 다큐멘터리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때문에 관객에 따라 상업영화로의 보편적 자극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고, 때로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차의 꿈>이 사용한 상실의 방식은 현실의 상실과 비슷하다.
우리가 삶에서 겪는 많은 상실도 이유와 이후 찾기 어렵다.
상실이 나에게 왜 찾아온 건지, 상실한 것은 나를 떠난 이후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상실 후 확실하게 존재하는 건 데카르트의 말처럼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이때 가장 안 좋은 선택은 상실의 원인을 자신에게 찾는 것이다.
영화 후반 거울을 바라보는 로버트처럼 우리도 상실을 겪은 나를 그저 온전히 바라보아야 한다.
억지로 웃어 보이거나, 슬픔에 빠져 울 필요도 없다.
무표정이어도 좋으니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는 순간이 필요하다.
밋밋할 수도 지루할 수도 있는 연출이지만, 역설적으로 영화의 표현 방식은
앞서 언급한 '로버트의 찰나의 기쁨'이 관객에게 전달되는 효과를 극대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