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 클래스와 그들만의 리그

<프랭크>

by Moon And Collins


영화 <프랭크>와 관련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프랭크>_2014__: 5/5


한줄평: 질투어린 시선으로 바라 본 '어나더 클래스'와 '그들만의 리그'


yPd5jIlrkvVrBEG46wTFvJTHZNk.png <프랭크>


1-지음


지음(知音)이라는 고사 성어를 참 좋아한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 거문고 명인이었던 백아와 그의 친구 종자기, 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백아가 거문고로 무엇을 표현하든 종자기는 그 음률을 이해했다고 한다.

종자기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백아는 거문고의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

이를 백아절현이라 한다(伯牙絶絃)


영화 <프랭크>는 프랭크와 그의 ‘지음’들, 그리고 지음이 아닌 자들로 구성된 영화다.

프랭크가 백아라면 그의 밴드 멤버들은 종자기인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 존과 밴드 매니저 돈은 프랭크의 지음이 아니다.


지음이 아닌 자들을 먼저 보자.

재밌게도 지음이 아닌 자들은 모두 프랭크처럼 작곡가 출신이다.

존은 형편없는 작곡가이다.

사실 그를 작곡가라 칭하기도 애매하다.

영화 내내 존은 제대로 된 노래를 선보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나마 작곡한 몇 마디는 표절이다.

돈은 작곡을 포기한 자다.

한때 작곡에 열정 있던 뮤지션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프랭크를 돕는 밴드 매니저다.

돈은 존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말한다.

‘“나는 왜 프랭크가 될 수 없지?”라는 생각이 들 거야, 아니면 “나도 프랭크가 될 거야”라든지. 하지만 프랭크는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어.’

존과 돈이 프랭크처럼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존의 경우 관찰의 부재고

돈의 경우 동경의 존재다.


존의 눈은 스쳐 지나가는 모든 대상을 스쳐볼 뿐이다.

구멍이 숭숭 뚫린 그물을 던져두고 악상이 얻어걸리기를 기다린다.

결과는 진부한 멜로디, 유치한 가사로만 가득 찬 곳에 스스로를 가둔다.

프랭크의 눈은 현저히 다르다.

프랭크는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동시에 본인이 대상을 어떻게 느끼는지, 대상은 본인을 어떻게 느끼는지 성찰한다.

그에게 있어 이 세상은 거대한 믹싱룸인 것이다.


돈은 마네킹을 사랑하는 특이한 정신병력을 가지고 있다.

정신병원에서 프랭크를 만난 이후로 많이 호전되었다 말하지만, 프랭크와 함께 있는 돈은 이제 마네킹 그 자체가 되었다.

돈의 죽음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소론프르프브스의 앨범이 완성된 다음날, 돈은 프랭크의 탈을 쓰고 자살한다.

인간을 본떠 만든 마네킹은 인간처럼 옷을 입는다.

마찬가지로 돈은 프랭크처럼 스스로를 꾸미고 세상을 떠났다.

작곡을 포기하고 동경이자 질투의 대상인 프랭크를 묵묵히 바라보다 스스로의 쓸모가 다 했음을 알게 된 돈은 자신이 마치 마네킹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콥과 시몬 그리고 클라라는 프랭크의 지음이다.

이들은 프랭크가 원하는 리듬과 멜로디를 곧장 파악하고 눈 위에 눈이 쌓이듯 자연스럽게 프랭크와 음악적 교류를 나눈다.

이들은 음악뿐만 아니라 프랭크의 심리 상태도 정확히 파악한다.

세 사람은 페스티벌 참가를 단호히 거절했고 프랭크를 회유한다.

프랭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필요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프랭크 또한 세 사람을 지음으로 인정한다.

클라라가 떠나자 프랭크는 더 이상 좋은 음악을 만들지 못한다.

마치 종자기를 떠나보낸 백아처럼 말이다.


프랭크는 허름한 술집에서 세 사람을 다시 만나고 나서야 다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시작한다.

그리고 지음이 아닌 자는 미련 없이 떠난다.

rEiECuqV2bk_cNAdjP0IKcvjAh4.jpg <프랭크>

2- 탈


탈을 쓰면 상대는 내 표정을 알 수 없다.

탈은 내적 교감을 막는다.

프랭크는 늘 탈을 쓴다.

탈은 프랭크를 베일에 감춰진 인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세상과 척을 진 프랭크의 태도이기도 하다.


존은 프랭크의 민낯을 궁금해한다.

어떻게 생긴지도 궁금하지만 어떻게 천재가 된 것인지 그 배경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영화는 어린 시절 평범하던 프랭크가 왜 지금처럼 변했는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존은 그가 어린 시절 학대 당했을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프랭크의 부모님은 너무 큰 음악적 재능이 도리어 재앙이 되었다 말한다.

내가 본 프랭크는 ‘그냥’ 세상이 싫은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너무나 난해하다.

어쩌면 존과 돈이 탈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 한 것일 수도 있다.

이들을 위해 프랭크는 자신의 표정을 말로 설명한다.

표정 없이 대화가 어려운 존과 돈의 언어와, 표정 없어도 마음으로 통하는 프랭크의 언어가 서로 교류할 때 클라라는 존을 경계하기 시작하고 프랭크를 잃을까 두려워한다.


프랭크의 탈을 보며 ‘인과관계’에 대한 생각을 했다.

삶에 있어 이유 없는 불행이나 불안에 대해 나는 어떻게 반응했는지 돌이켜보았다.

나는 그것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해 교류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들의 표정을 알 수 없어 답답해했고 화를 냈고 어떻게든 탈을 벗기려 했다.


언젠가는 이유 없는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한다.

<프랭크>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노래가 너무 좋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언젠가 그것이 가능하리라 기대해 본다.

s1lGouqsk4cMWMDC95xxjlmtwq4.jpg <프랭크>

3- <프랭크> 속 아티스트


<프랭크>의 주제의식은 단순히 프랭크가 천재인가 괴짜 인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는 아주 면밀하게 예술과 예술가의 역할을 말한다.


과거 경험을 이야기해보자면

나는 라디오헤드의 ‘Karma Police’라는 노래 제목을 게임 아이디로 사용했었다.

운 좋게 게임 프로팀에 들어갔고 대회에도 같은 아이디로 출전했다.

만약 대회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면, 나는 이만큼 라디오헤드를 좋아한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연습 중, 정말 우연히 팀원이 Karma Police를 듣게 되었다.

‘뭐야 이딴 노래를 누가 들어’

팀원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프랭크>를 보면 그날의 감정이 떠오른다.

나에게 성역이라 의심치 않았던 것들이 누군가에겐 한낱 조롱거리로 치부될 때의 붕괴 간 말이다.


영화 속 존도 같은 일을 겪는다.

천재로만 알고 있던 프랭크는 도시 사람들에게 그저 ‘웃긴 컨셉충’취급을 받는다.

존은 프랭크에게서 천재성, 독창성을 느꼈지만 대중은 그에게서 황당함, 거부감을 느낀다.

마지 나의 라디오헤드 사건처럼 말이다.


어떤 예술가들은 괴짜로 낙인찍힌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일 수도, 작품이 너무 난해한 이유일 수도, 또는 아직 덜 유명해서 일 수도 있다.

이처럼 한 시대가 타고난 예술가를 괴짜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이유는 많다.


예술가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했다면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자.

예술가는 분명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직업이다.

슬플 때 위로가 되어주는 노래가 있고, 바라보면 한없이 빠져드는 그림들이 있다.

시대를 넘나드는 작품은 고전이 되고, 작품은 시대를 대표한다.


라디오헤드도 프랭크도 이런 예술가의 양면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프랭크가 오두막에 불쑥 찾아온 세입자 가족을 달래는 장면을 보자.

안락한 휴가를 꿈꿨던 아주머니는 웬 한량 같은 놈들이 오두막을 점거하고 있는 것을 보고 화를 낸다.

프랭크는 그런 아주머니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두 사람은 잠시 걸었을 뿐인데 화를 내던 아주머니는 얼마 안 가 눈물을 보이고, 웃음을 터트리고 프랭크와 춤을 춘다.

어떤 예술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불편한 자에게 안락함을, 안락한 자에게는 불편함을 주는 것이다.

때론 흥분하게 하고, 분노케 하고, 눈에 눈물이 고이게 하고, 웃음이 피어나게 하고, 춤추게 하는 것이 예술이다.

이 과정 없이는 ‘자기 영혼의 진실을 깨닫는 것’에 도달할 수 없다.


프랭크는 마지막에 누군가의 영혼을 대신 울려준 목소리들에게 노래한다.


‘I LOVE YOU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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