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 남겨둔 그대의 슬픈 표정과 선명한 음악소리

영화<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by Moon And Collins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관련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_2020__: 5/5


한줄평: '지옥에 남겨둔 그대의 슬픈 표정과 선명한 음악소리'


image.png?type=w966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제목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원문 제목은 'Portrait of a Lady on Fire'이다.

나는 원문보다 번역문이 더 훌륭한 제목이라 생각한다.

한글의 문법적 특성 때문에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혹은'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서로 다른 제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목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경우

다른 화가에 의해 그려진 엘로이즈의 얼굴 없는 초상을 마리안느가 태우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 그림은 잘못 그려진 그림이다.

당대의 초상화가 증명사진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굴이 없는 초상화는 분명 실패작이다.

이 실패작은 기술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자기 삶에 주도권을 가지지 못하고 어머니에 의해 정략결혼의 피해자가 될 엘로이즈의 미래를 상징하는 초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미래를 부정하듯 엘로이즈는 초상 속 자신의 얼굴을 지워냈고,

마리안느는 그 지옥 같은 미래의 계약서를 불속에 태워버린다.


초상을 태우기 전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자신이 밀라노에서 들었던 음악을 설명해 주는 장면이 있다.

비록 미숙한 연주에 음악의 일부만을 들려준 것이지만,

이 장면부터 마리안느는 더 이상 엘로이즈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얼굴을 관찰하러 온 사람이 아니게 된다.

엘로이즈도 마리안느를 더 이상 경계하지 않는다.

그렇게 관찰과 경계는 관심이라는 사랑의 씨앗이 된다.


제목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경우

합창회에서 드레스에 불이 붙어 엘로이즈가 쓰러진 후에

급속도로 발전하는 두 사람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다.

타오르는 것은 엘로이즈의 드레스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향한 마음에 붙은 불로도 보인다.


이후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더 이상 당대 여성 초상의 관념을 따라 부드럽고 온화하게 그리지 않는다.

홍조는 지우고 선은 굵어져서 표정은 강인하다.

더는 정략결혼의 계약서 역할을 할 초상이 아닌,

마리안느가 사랑하는 엘로이즈의 모습이다.


영화는 '여인의 초상'을 불태우고 '(사랑, 자유 의지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그려내며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을 표현함과 동시에

오늘날 비록 개선되었다 말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과 이를 침묵하는 '잘못 그린 초상'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질문을 던진다.


image.png?type=w966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오르페우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음유시인. 그의 노래와 리라 연주는 초목과 짐승들까지도 감동시켰다고 한다.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자 저승까지 내려가 음악으로 저승의 신들을 감동시켜 다시 지상으로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지상의 빛을 보기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지키지 못해 결국 아내를 데려오지 못하고 슬픔에 잠겨 지내다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오르페우스 신화와 같은 플롯을 따르는 비극 작품이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고,

엘로이즈를 지옥에 남겨둔 채 마리안느는 떠날 수밖에 없다.


영화 속 마리안느, 엘로이즈, 소피 세 사람이 독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 낭독하는 내용이 오르페우스 이야기이다.

소피는 오르페우스가 돌아보지 않았다면 그들의 사랑이 희극으로 끝났을 거라며 그를 탓한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에우리디케가 그를 불렀을 수도 있지..'


해당 대사에 대해 밤새 고민해 보았다.

에우리디케가 정말 그랬다면 왜였을까?

완전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이지만,

에우리디케는 운명에 체념한 상태였거나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영화는 아주 명확하게 오르페우스를 마리안느로 에우리디케를 엘로이즈로 대응한다.

엘로이즈는 운명에 체념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

원래 수녀의 길을 걷던 그녀는 언니가 죽자 어머니의 등쌀에 떠밀려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한다.

언니의 죽음과 바라지 않던 미래는 그녀를 슬픔의 마지막 단계, 체념의 상태로 데려다 놓았다.

때문에 그녀는 운명을 이겨내기 위한 발버둥 없이 어느 정도 어머니에게 협조하는 모습마저 보인다.


반대로 마리안느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당대 기준 비교적 진취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

(물론 자신의 그림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신 발표하는 등의 시대적 차별은 있었지만)

그녀는 결혼을 자유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로 한 그녀는 계속된 미술 활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어나갈 것이다.

스스로의 결심으로 낙태 경험까지 있던 마리안느는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이지 체념하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는 이 부분을 수영으로 표현한다.

물살에 떠밀려 가는 짐을 건지기 위해 마리안느는 거침없이 바닷로 뛰어들어 수영하지만,

엘로이즈는 물속에 들어가서도 자신이 과연 뜰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시대가 이미 흘러간 과거라는 점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가 설령 극적 타협을 이루어,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 서서 억압받는 이가 없다 할지라도.

과거에 그려졌던 셀 수 없이 많은 잘못된 초상들을 불태울 순 없을 것이다.


그 초상들은 마지막 장면의 엘로이즈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동시에 다시 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 에우리디케의 얼굴일 것이다.

신화 속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의 표정만 볼 수 있을 뿐 그 목소리를 듣을 수 없던 것처럼

현실에 사는 우리는 그들의 심정을 어림짐작할 뿐 그들이 직접 전하는 메시지를 들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의 삶에서 어떤 초상이 옳은 초상인지 고민하는 일뿐이다.


마지막 장면은 기술적으로도 완벽하다.

과거 두 사람의 관계를 시작하게 했던 마리안느의 불완전한 음악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소리로 다시 등장한다.

음악을 감상하며 눈물 흘리는 엘로이즈는 중간중간 환한 미소도 보인다.

그 미소는 마리안느와 사랑했던 꿈같은 시간에 대한 회상이리라.

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 에우리디케가 저런 표정을 지었다 생각하니 끔찍함과 애틋함이 밀려온다.

너무나 사랑해서 이별이 찢어질 듯 아프지만,

그 순간마저도 상대를 달래고 싶은 마음과 함께 했던 추억이 기쁨의 미소로 마침표가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