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짧은 도피도 작은 웃음이 돼.

by 연하일휘

얇은 구름이 여러 겹 덧씌워져, 흐린 하늘을 완성한다. 옅은 햇빛이 방 안으로 내려앉지만, 이마저도 누이 부셔 작게 뜬 눈이 찡그려지며 다시 감긴다. 일어나기 싫은 날이다. 다시 잠들기도, 그렇다고 자리에서 일어날 의욕이 나지 않는다. 무기력이 내려앉은 아침, 깊은 한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해야 할 일들이 떠오르지만, 꼭 감은 두 눈을 뜨지 않는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어제, 학생 하나와 갈등이 있었다. 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틀리니, 잔소리를 듣는 학생도 답답했던지 내뱉은 말에 폭발하고 말았다. 몸이 떨려올 정도로 감정에 한차례 휩싸인 채, 수업이 끝났다. 그 감정의 잔재는 분노가 아닌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자책으로 남고 말았다. 어른이면서- 여전히 감정 갈무리를 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탓한다.


남은 잔재들을 털어내고 싶다. 하지만 마땅히 갈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 반짝, 눈을 뜨며 언니에게 전화를 건다. 지난주, 사 두고 잘 신지 않는다던 신발들을 받아가라던 언니의 연락이 기억난 까닭이다. 언니와 나는 약 18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자동차로 20-30분 정도 걸리는 거리, 제주도에서는 체감상 꽤 먼 거리이다. 해안가에 사는 언니는 안개가 꼈다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전한다. 짧은 고민을 하지만, 이유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보다는 오랜만에 자매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낫겠다는 선택을 한다.



cat-4057406_1280.jpg Pixabay




간간이 파란 하늘들이 조각처럼 박혀 있다. 햇빛이 내려쬐기도 하며, 걱정했던 안개는 사라져 있다. 도착한 언니네 집은 고요하다. 아직 잠들어 있는 조카가 깰까, 서로 목소리를 낮춘 채 대화를 나눈다. 베이비캠을 켜 둔 화면에 기지개를 켜는 조카의 모습에 언니가 방으로 들어선다. 백일이 지났다고 제법 몸을 가누기 시작한 조카를 처음으로 안아 든다. 목이 굳기 전에는 혹여 잘못될까 무서워 안아보지도 못했는데, 품에 안기니 어깨에 고개를 폭 기대는 녀석이 귀엽다.


잔잔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다. 간간이 눈물을 닦아내는 언니의 모습을 본 것일까, 조카가 잔뜩 찡그리며 미간을 움찔댄다. 언니가 안아 들자, 그제야 조카가 활짝 웃는다. 엄마가 우니까, 아기도 따라 우나 보네- 내 말에 언니는 울음기를 거두고 한차례 밝게 웃는다. 함께 식사를 하고,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선다. 큰 종이가방에 담긴 신발 네 켤레, 택도 떼지 않은 새 신발도 들어있다.


돌아오는 길은 크게 변한 것은 없다. 간간이 파란 하늘이 박혀 있지만, 대신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진다. 여전히 출근은 마음이 무겁다. 도피하고 싶은, 벗어나고 싶은 그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다. 혼자였다면, 뚱한 표정으로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냈을 테다. 잠시 현실을 도피하려, 핑곗거리를 만든 아침이었건만 웃음기 섞인 하루의 시작이 되었다. 작은 빗방울 몇 개가 떨어지듯, 작은 변화 몇 개가 일상에 자국을 남긴다. 그 정도만으로도 제법 나쁘지 않은 하루다.



[메인 이미지 출처 : Pixabay]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이들을 믿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