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눈동자에 흔들리며 물기가 맺힌다. 이내 흐느끼며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트리는 학생을 조심스레 안아 토닥여준다. 괜찮아- 울 때는 실컷 울어도 돼- 어깨 위에 얹은 손으로 떨림이 전해진다. 첫 이별을 겪은 아이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한다.
사고 기사 하나를 보았다. 익숙한 지명에 혹시나 하던 짐작이 들어맞았다. 학원에 다니는 학생의 학교와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사고, 그 학교를 다니는 아이에게 일어난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이 들어맞듯 아이가 결석을 했다. 조금은 감정을 추스른 듯, 학원에 온 아이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고민을 했다. 아예 언급을 하지 말까, 괜찮냐고 물어볼까. 후자를 선택한다.
"괜찮아?"
대답을 하지도 못한 채, 아이는 울음을 터트린다. 이 아이의 선배가 미리 말을 건네주었었다. 친했던 친구라고. 괜찮냐는 말은 간신히 그쳤을 울음을 다시 터트리게 만들 수도 있지만, 건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네 아픔을 걱정해 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탓이다.
"많이 울어도 돼. 슬플 때는 우는 거야. 대신 너무 오래 울지만 마."
슬픔에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맞다. 참고 참다가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길게, 오래 눈물을 흘리면, 슬픔이 잘못된 방향으로 번져나갈 것이 걱정된다. 간간이 눈물을 닦아내는 아이에게 토닥임을 전해주는 것 외에는 해줄 수 있는 일이 그다지 없다.
수업 중 한 친구가 말실수를 건넸다. 친구를 잃은 그 아이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다른 학교 친구들은 네 눈물을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어. 근데 그건 경험해보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그런 말들은 그냥 흘려보내도 돼. 경험해 봐야만 아는 아픔이잖아."
말실수를 한 친구도 이해는 한다. 아직 이별을 경험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그때 그 옆에 앉아있던 한 학생이 손을 든다. 선생님, 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이제야 3년 정도 흐른 학생이다.
"살면서 누구나 이별을 경험하는데, 너희는 아직 너무 어리다. 너무 어려서 더 걱정돼."
중학생 아이들, 이 아이들은 너무 어리다. 전학이나 이사와 같은 이별과는 다른, 죽음이라는 이름이 아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무겁다. 어른이라고 안 아플까, 버티고 견디는 어른들도 때때로 무너지고 마는데. 여전히 아프고 힘겨운데. 이제야 갓 여러 감정들을 받아들이느라 힘겨운 어린아이들에게는 너무 벅찬 아픔이다.
"웃어야 해. 많이 운 다음에는 웃기도 해야 해. 그걸로 죄의식을 삼으면 안 돼. 네가 잘 지내야, 걱정을 내려놓고 편히 쉰 대."
떠들썩한 장례식장의 모습, 과장된 웃음소리들. 그 모든 것들은 산자들이 버티기 위한 웃음이면서도, 망자를 위한, 걱정 말고 떠나라는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 가까운 이를 떠나보낸 뒤, 홀로 웃으며 즐거워하는 시간에 죄의식을 삼을까 걱정된다. 그리고 아이에게 위클래스에 다녀오라고, 너무 힘들면 부모님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는 말을 전한다.
"엄마아빠는, 너무 걱정할까 봐 앞에서 못 울겠어요."
"이해해. 그러니까 꼭 위클래스에 가서 선생님이랑 이야기를 많이 해봐. 아프면 아프다고 털어놓을 곳이 있어야 해."
줄곧 작은 입술을 다물던 아이는 얼굴에서 어두운 기색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이별은 아프다. 하지만 사별은 절망스럽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그 사실이 좌절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선생님도 알아, 떠나보낸 이들이 있으니까. 그렇기에 저 작은 아이가 더 안쓰럽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지만, 아직은 겪지 않기를 바랐던 아픔. 이별을 경험하기에는 너희가 너무 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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