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싫어하는데 밥은 먹어야 해.
은빛 형체를 볼 때마다 든든하면서도 귀찮음이 몰려온다. 종종 들르는 마트에서 '할인'이라는 글자가 붙을 때, 사놓은 대용량 참치캔 하나가 선반을 차지한 탓이다. 요즘 바쁘니까- 핑계를 대며 미루고 미루다, 한밤중에 참치캔을 따기 시작했다. 캔 오프너를 힘주어 누르고, 빙글빙글 레버를 돌리다 손바닥이 빨갛게 물들었다. 요령이 없는 건지, 군데군데마다 칼집이 들어가지 않아 여는데만 한참이다.
대용량 참치캔을 사면 소분을 해 냉동실에 넣어둔다. 찌개를 끓일 때, 육수를 낼 필요 없이 마지막에 얼린 참치 조각을 톡 넣으면 간단한 찌개가 완성된다. 요리의 귀찮음이 가장 큰 나로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일등공신이다. 혼자 먹는 밥은 모양과 정성보다는 쉽고 빠르고 간편한 것이 가장 일 순위다. 그래서 요리 실력이 더 늘지 않는 걸까.
칼질이 서툴다. 혼자서 이런저런 음식들을 해 먹어 보지만, 느린 손과 서툰 칼질이 재료 손질에만 긴 시간을 소요하게 만든다. 그래서 싫어하고, 싫어하다 보니 실력은 더 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채칼이라도 있으면 조금이라도 편리할까 싶어 다이소에서 날을 교환할 수 있는 녀석을 구입했다. 채칼을 쓰다 크게 손을 베일 수 있다는 말에 조심스러운 손길이 더해지니 걸리는 시간은 결국 비슷해졌다. 그래도 내 손으로 할 수 없는 작고 얇게 써는 것이 가능하다는 장점에 없어서는 안 될 꽤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내가 채칼을 쓴다는 말에 어머니는 걱정이 많았다. 너, 장갑 꼭 끼고 조심해서 해야 해- 혼자 살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어머니는 불안감을 자주 드러냈다. 어쩔 수 없다. 우리 집안에서 유일하게 요리를 못 하는 아이. 남동생과 아버지마저도 칼질부터 나와는 다르다. 정말 어디 가서 주워온 애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조심스럽게 채칼을 사용하고, 뒷정리를 한다. 날을 빼내고, 안에 남아있는 야채 조각들을 헹궈내려는데, 새끼손가락에서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진다. 옆에 올려두었던 칼날에 손을 베었다. 정확히는 살점이 잘려나갔다. 통증도 없고, 새하얀 단면을 빤히 바라보다 붉은 피가 주르륵 흐른다. 급한 대로 거즈를 꺼내 상처부위를 압박하지만 출혈이 꽤 많다. 한 손으로 겨우겨우 거즈를 두툼하게 댄 채, 반창고를 과할 정도로 감는다. 피부과? 외과? 정형외과? 가장 가까운 병원은 정형외과다.
다행히도 꿰매거나 할 정도는 아니고, 병원에 주기적으로 들러 드레싱을 받으며 경과를 지켜봤다. 이런 상처는 건조해지면 오히려 덧난다고, 습윤밴드를 붙이고 통증에 손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었다. 수업을 하면서도 손을 내릴 때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한 손을 든 채로 수업을 하다 보니, 한 학생이 이런 말을 꺼냈었다.
"쌤, 오른손에 흑염룡이 있어요?"
그런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다 나았으면 좋았으련만, 피부가 예민함을 뽐내고 말았다. 상처부위 주변으로 습진이 생겼다. 결국 상처가 나은 뒤에도 습진 덕분에 한동안 더 연고를 바르며 고생이 이어졌다.
이후부터 채칼 사용도 점점 줄어들었다. 채칼을 사용하던 중도 아니고, 뒷정리를 하다 다칠 줄이야. 덕분에 작게 잘려서 나오는 냉동야채들을 냉동실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그래서 내 칼질과 요리 실력이 점점 더 퇴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냉동 용기에 참치캔을 적당량씩 덜어 놓으며 소분을 완료했다. 대용량 참치캔의 단점은 참치들이 부스러기 형태라는 점이다. 종종 제 형태를 유지한 커다란 덩어리들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이 잘게 부서져있다. 뭐, 찌개를 끓일 때야 '참치 건더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참치 육수'가 필요한 것이니 단점이라기에는 미미하다.
냉동실용 수납함 하나를 꺼내 소분한 참치를 차곡차곡 쌓는다. 그리고 수납함 채로 들어 올리려는 찰나, 오른손 약지에서 익숙한 감촉이 느껴진다. 다급하게 손을 보니 캔의 잘린 단면에 내가 그대로 손을 쿡- 찍었다. 새로 생겨난 상처에 한숨을 쉬며 물로 한 번 헹궈낸다. 저번처럼 아예 살점이 잘려나간 것은 아니라 다행일까. 물을 대충 털어낸 뒤, 알코올솜으로 상처 부위를 소독한다. 그제야 피가 퐁퐁 솟아난다. 상처가 크지 않아 밴드 하나를 압박하듯 붙인다. 하지만 출혈이 크기는 한 듯, 얼마 지나지 않아 밴드 수용량을 넘어선 핏방울들이 삐져나온다.
밤중에 여러 차례 밴드를 갈며 나름대로의 압박을 가한다. 연고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얼마 전 약통을 정리하다 유통기한이 지난 연고들을 버리고 나니 남아 있는 건 거즈와 반창고, 밴드뿐이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밴드를 새로 붙인다. 작은 핏방울의 흔적이 보이지만, 지혈은 잘 된 모양이다.
조카 덕분에 백일해를 맞으며 파상풍 주사도 맞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덕분에 걱정 하나는 덜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밴드 여러 개로 끝난 상처.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다치지 않으려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데, 사용할 때는 안 다치더니 뒷정리를 할 때 되어서야 다친다. 가장 긴장감이 풀린 덕분일까.
작은 상처 하나를 얻었지만, 냉동실 한 편을 가득 채운 덕분에 마음만은 풍족하다. 이제 또 한동안 초간단 찌개가 가능하다. 물을 넣고, 두부와 김치를 넣고, 버섯도 넣고 끓이다가, 냉동 참치를 넣고 한소끔 끓이면 완성. 요리를 못하고, 요리를 싫어하지만 어찌어찌 하루하루를 잘 넘기는 와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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