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공간이 따스함으로 메워진다
벌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날숨에서 김이 오를 것만 같다. 새벽녘 선풍기 바람에 차게 식어 몸을 감쌌던 이불은 저 아래로 밀려나 있다. 조금 늦은 기상, 평소보다 더 많은 햇빛이 방 안으로 들어서 있다. 덥다. 하루가 더해가며 더위도 한 겹 씩 더해진다. 30.2°C, 눈을 뜨며 한낮의 무더위를 예감한다.
발치에 늘어져 있던 강아지가 혀를 내민 채, 헥헥거리며 얼굴께로 다가온다. 쫑긋 세워진 귀가 붉게 물들어 있다.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에어컨의 전원을 켠다. 누나가 없어도 너는 시원하게 지내야지.
오늘은 출근 전부터 일정이 잡혀 있다. 병원에 다녀와야 하는 언니가 어머니에게 아기를 돌봐달라 부탁을 했다. 나는 운전기사로 낙찰. 어머니가 아기를 돌보는 동안 옆에서 구경하는 역할이다. 커피를 사든 채 언니네 집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손주를 보러 가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작은 즐거움에 상기되어 있다.
에어컨을 켠 차 안은, 끊임없이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뒤섞인다. 햇빛이 내려앉는 자리마다 뿜어지는 열기는 에어컨 냉기와 힘겨루기를 한다. 운전대를 잡은 손을 열어갈 것 같은데, 햇빛에 밝게 빛나는 허벅지는 타들어간다.
아기를 키우는 집의 장점. 한 여름에도 서늘하다. 애매한 시원함 속에서 달궈진 피부가 빠르게 식어간다. 단잠에 빠진 조카의 모습이 태블릿 화면에 떠 있다. 소파에 자리를 잡은 어머니는 연신 화면으로만 시선이 간다. 그러다 춥다는 말과 함께, 담요를 꺼내 몸을 감싼다. 거실을 둘러보던 어머니는 툭, 한 문장을 내뱉는다.
" 애기 장난감이나 책이 많아도 너무 많아. "
그 말 뒤로 '유난이야'라는 단어가 숨어 있는 듯하다. 우리가 어렸을 적보다 확연히 늘어난 육아 용품들이 생소한 탓이다. 이잉-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빠르게 몸을 일으킨 어머니는 아기 침대로 향한다. 걸쳐있던 담요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이구, 할머니 왔어~ 잘 잤어요~?"
담요를 갈무리하는 사이, 한껏 톤이 올라간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손주 얼굴을 볼 때마다 행복해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포근하다. 아기를 안고 거실을 돌아다니며 눈짓 하나. 표정 하나, 손짓 하나까지도 어머니는 아가의 모습을 눈에 새겨 놓는다.
이젠 뒤집기를 마스터했다. 눕혀 놓을 때마다 저 혼자 몸을 뒤집고 장난감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다. 아직 배밀이를 하지 못해 꼼질거리는 아가를 바라보다 어머니는 다시 품에 안고 장난감을 흔들어준다.
춥다던 어머니의 얼굴은 발그레 혈색이 든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훌쩍 자라 났다며 조그만 손을 꼭 쥐거나, 길어진 다리를 쓰다듬는다. 나는 어머니가 덮었던 담요를 끌어온다.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추위가 느껴진다. 추위가 가신 어머니는 이름을 부르며 아가와 눈을 맞춘다. 짧은 시간 동안 손주의 온기를 전해받는 시간, 할머니의 사랑을 전해주는 시간. 햇볕의 뜨거움이 침범하지 않는 선선한 공간이 따스함으로 메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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