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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손도 여름의 즐거움이지.

어지러이 흩어진 감정들이 평정을 이루는 순간.

by 연하일휘

내뱉던 한숨을 들이마시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억누르지 못한 화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작은 상자 안으로 힘겹게 밀어 넣는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면, 감정이 제 몸짓을 부풀릴지도 모른다. 채점을 핑계 삼아 붉은 펜만 바쁘게 움직이며 말을 이어나간다.


"숙제 안 한건 혼 안 냈잖아. 그래도 낼모레가 시험인데 문제는 풀어야지."


"근데 다른 애들은 안 남길 때도 있잖아요."


"그때마다 너도 안 남았단다."


"그래도 맨날 남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숙제를 안 한 녀석이 45분 내내 불평을 토해낸다. 시험이 일주일 남았다. 주말 내내 출근을 하고, 저녁에는 조카의 시험대비를 도와주느라 정신이 없다. 제대로 쉬지 못해 신경이 예민하다. 그 와중에 못 한 숙제를 남아서 풀고 가라는 말에 학생은 끊임없이 툴툴거린다. 이미 며칠 전에 숙제 문제로 이 학생과 부딪혔었다. 언성이 높아져도 내 마음만 불편하리란 사실을 이제 안다.


"그럼 가. 내일 일찍 와서 검사받아."


단호하게 뱉은 말에 그제야 우물거린다. 그때 아니면, 이거 채점 못 해줘- 학생에게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다음 수업을 준비한다. 시험기간이 아닌, 평소였다면 잔소리와 회유를 섞은 채 보충 수업을 진행했을 터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다른 학생들도 수업을 기다리며 창 밖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다. 들리지 않게 작은 한숨을 내뱉는다. 어차피 30분도 안 걸릴 텐데, 그냥 풀고 맘 편히 내고 가면 될 것을. 올라오는 불만을 다시 꾹 눌러 담으며 수업을 시작한다.


투명한 상자 안에 얽힌 채 담겨 있는 감정들은 다시 풀어내기 쉽지 않아 보인다. 작은 상자를 가득 메운 감정들이 부풀려져 간다. 얇은 그 벽에 금이라도 간다면, 뒤섞이며 터져 나올 감정들은 나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할 것이 분명하다. 커피 한 모금을 넘기며 시선을 돌린다. 속상한 일도 있지만, 웃는 일도 많으니까. 억누른 감정 위로 아이들과 함께 만든 웃음을 한 겹씩 덮어 둔다.


피부에 내리쬐는 햇볕이 따갑다. 주차를 하고 집으로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사이에도 땀방울이 맺힌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확연히 밖보다는 선선한 공기가 가득 메워져 있다. 28도. 움직이면 열이 오를 테지만, 가만히 있으면 꽤 쾌적한 온도다. 아침에 정리하지 못하고 나간 이부자리 위에 강아지가 깊이 잠들어 있다. 이젠 잘 들리지 않으니 누나가 집에 오는 것도 모른 채 자는 녀석이다. 작게 코를 고는 소리를 듣다 욕실로 향한다.


물방울이 타일을 두드리는 소리 사이로 타박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빼꼼- 욕실로 고개를 내밀던 녀석이 눈인사를 하고선 다시 몸을 돌린다. 귀여운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마음속 상자 위로 이 웃음 한 겹도 마저 덮어 놓는다.


물기를 털어내며 시간을 본다. 가볍게 식사를 하고, 다음 수업 준비를 해야 한다. 어제 조카에게서 추가 학습지로 진도를 나갔다며 사진 몇 장이 도착했다. 아, 학원 학생도 추가 학습지 사진을 보내줬는데. 시원한 에어컨 앞에서 축 늘어져 게으름을 피우고 싶지만, 할 일들이 쌓여있다. 아- 피곤해- 그래, 일주일만 잘 견디자, 일주일만.


ice-lemon-tea-1726270_1280.jpg Pixabay


책상 앞에 앉기 전, 얼음을 가득 넣은 컵에 달콤한 아이스티 한 잔을 우려낸다. 입안으로 퍼지는 단맛뿐만 아니라, 저 혼자서도 달그락거리는 얼음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기분 좋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키보드 위로 움직이는 손가락들이 만들어가는 학습지가 한 장씩 늘어가며 급한 준비가 마무리되어 간다. 물방울이 맺힌 컵을 쥔 채, 잠깐 휴식의 시간을 갖는다.


마음이 조금 더 넓었다면 좋았을 텐데. 작은 상자 하나가 마음속에 놓여 있다. 시시때때로 올라오는 감정들을 잠시 담아두는 그 상자가 너무나도 작다. 칙칙한 색의 마음들을 꾹꾹 눌러 담을 때면, 투명한 상자가 보기 싫게 물들어버린다. 뒤늦게 웃음으로 덮어 두었던 상자를 살핀다. 금세 터져버릴 것만 같았는데 어느샌가 차분하게 감정들이 가라앉아 있다. 어둑한 색상들이지만, 잔잔한 여울이 지며 작은 평정을 이루고 있다.


작게 숨을 내쉰다. 답답함의 한숨 대신, 가라앉은 감정들을 내뱉기 위한 숨이다. 일주일만 조금 더 웃음으로 마음을 덮자. 조금만 더 작은 웃음들을 쌓아나가자. 손을 적시는 물방울들의 감촉을 여름의 즐거움으로 삼는 순간.



[메인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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