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할머니 댁은, 작은 마당이 있는 이층 집이었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철제로 만들어진 틀에 포도 덩굴이 어지러이 감겨 있었어요. 덩굴들은 겨울이면 생명력을 잃고, 새하얗게 질린 채 굳어 있었죠. 그러다 여름이 다가오면 푸른 잎사귀들이 마당에 짙은 그늘을 내리며 지붕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조금만 키가 더 자란다면, 손이 닿을 것만 같은데. 아슬아슬하게 내 손 끝을 스쳐 지나가던 푸른 지붕은 하늘을 숨겨주곤 했었어요. 어둑한 지붕 아래, 가끔 그 틈새로 파란 하늘을 뽐내곤 했었거든요.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지붕을 지나가면, 한 구석에는 커다란 장독들이 나란히 줄을 지어 놓여 있었습니다. 무거운 장독 뚜껑으로 덮여 있기도 하고, 가끔은 투명한 유리로 된 뚜껑이 덮여 있기도 했어요. 슬쩍 유리 너머, 장독 안을 들여다보면 된장이나 고추장이 한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식사 준비를 한다며, 장독의 뚜껑을 열면 작은 마당에 한가득 된장 냄새가 퍼지곤 했었죠. 된장을 싫어하던 어린 저는 코를 막고선 다른 한 구석으로 쪼르르 도망을 가곤 했었습니다. 어린 나에게 항아리 혹은 장독은 열지 말아야 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담겨있던 것들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그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커다란 장독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부모님이 그리고 친척분들이 나눠 가져가지 않았나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지요. 유일하게 집에 남아있던 작은 항아리에는 쌀이 담겨 있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던, 금세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만 담겨있던 그 쌀을 다 먹은 뒤에, 빈 항아리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며칠간 고민을 하다, 항아리를 안아 들고선 부모님 댁으로 향했어요. 할머니께서 쓰시던 항아리를 그대로 묵혀두긴 싫고, 내가 직접 사용할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어느덧 우리 집에는 단 하나의 항아리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담겨 있던 항아리들이 사라진 마당을 바라보다, 어릴 적 느꼈던 울림이 떠올랐습니다. 텅 빈, 내 몸만큼 크던 항아리를 발견하고선 호기심에 항아리 주변을 기웃거렸어요. 그러다 아무도 없을 때면, 그 큰 항아리 속에 고개를 살짝 들이밀고선, "와!"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항아리 속을 울리며 전해지던 그 소리는, 온몸을 울리는 진동이 되어 전해져 왔습니다. 항아리들을 모두 떠나보낸 뒤에서야, 그리워졌습니다. 온몸을 타고 흐르던 그 깊은 울림이요.
항아리에 울림을 남겨두고 싶어 졌습니다. 어린 나의 몸을 울리던 그 소리는, 이제는 기억 한 편에 남아있는 어렴풋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이젠 더 이상 내 몸만큼 커다란 항아리를 만나기는 힘들겠죠. 하지만 그 속으로 누군가를 부른다면, 그 이름의 울림만은 변함없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겨납니다. 그리운 이름이 있습니다. 불러도 닿지 않을 나의 목소리를, 그리운 이에게 전하고 싶어 집니다. 항아리를 향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면, 메아리치는 그 이름이, 그 울림이 전해질 수 있을까요.
사라져 버린 항아리들 대신, 짤막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담겨 있던 항아리들 대신, 이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저는 조금은 먼 곳으로 가곤 합니다. 푸른 풀들이 자라나는, 혹은 메밀이 익어가는. 추워지면 갈빛이 맴도는 곳으로요. 그곳에 앉아, 부르고픈 이름의 성씨만 남겨져 있는 그곳에서, 웅얼거리며 작게 부르곤 합니다. "할머니"하고요. 초석을 펴고, 준비해 간 음식들을 올리고 절을 한 뒤에 가만히 앉아 대화를 시작해요. 대화일까요, 혹은 혼잣말일까요. 듣고 있으리라 믿으며 떠듬떠듬 한 두 마디를 건네곤 합니다.
사실 혼자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많이 멋쩍어요. 그럼에도 가끔은 가서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때가 있곤 합니다. 아버지께서 퇴원하셨을 때나 어머니께서 입원하셨을 때, 그럴 때 마다요. 다만 종종 불어오는 바람은 작게 속삭이며 머뭇대는 소리를 휘감아 사라지게 하곤 합니다. 그대로 사라지는 것일까요, 혹은 바람이 그 소리를 안고 전해주는 것일까요. 입안으로 웅얼대던 소리는 바람이 불어올 때면 조금 크게 입 밖으로 내뱉어지곤 합니다. 아마, 내 소리를 전해주기를 위한 바람이 담겨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항아리 속을 맴돌던 울림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람이 부는 곳에서, 이름의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당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리움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