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밤을 걷는 냄새

by 연하일휘

하늘이 까맣게 물들어 색색의 조명이 불을 밝힐 즈음,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해가 뜨기 전의 고요한 공간을 독차지하는 것도 좋아하지만요.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해가 떠나간 곳을 걷습니다. 한낮의 어수선함이 채 가라앉기 전, 사람들의 활기가 고여있는 골목은 애매한 침묵만이 군데군데 고여있습니다. 귀를 괴롭히는 차 소리가 싫어 조용한 곳을 찾아 헤매지만, 잠들지 않은 이곳은 선택을 강요합니다.



골목을 걷다 큰 길가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좁은 길목을 오가는 차들과 서로 길을 양보하는 것이 조금 지겨워진 탓입니다. 큰길로 나오자마자 들릴 듯 말 듯 전해지던 발소리는 귀를 어지럽히는 붉고 하얀 조명들에 묻혀버립니다. 발걸음마다 이어지던 생각들의 흐름이 끊기고, 옆을 스쳐가는 속도의 소리에 주의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작은 후회를 하며 귀를 쉬어줄 수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한적한 도서관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저 큰길에서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소음들은 이미 저 먼 곳에서 자기네들의 경주를 시작합니다.



638096674956170261_0.jpg



까만 하늘을 장식하는 흰 구름을 구경하다 전해진 꽃내음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바로 옆에 위치한 화단에 줄 지어 서 있는 동백나무들을 그제야 발견했습니다. 하얀, 또는 붉은 색상의 동백꽃들이 이런 곳에 숨어있었네요. 본디 동백꽃의 향이 이리도 짙었었던가 생각을 하며 잠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동백꽃이 저 혼자 풍기는 향일까요, 혹은 동백꽃에 가려진 다른 꽃들이 함께 향을 어우러지게 한 것일까요. 할머니의 유품이 되어버린 작은 동백나무들을 접할 때에도 이 정도의 향을 느껴보진 못하였는데, 짙은 꽃내음에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들이 어여쁘게만 느껴집니다.



아마 큰 길가로 나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작은 후회와 함께 이 골목으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하였을 풍경입니다. 의미 없는 일이란 없다고 하죠. 하지만 때론 그저 시간을 흘려보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 걸으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또한 가끔씩은 사치처럼 느껴집니다. 한정된 시간 속 느긋한 여유를 즐기는 시간이기에, 오늘처럼 엉뚱한 길목으로 오다니면 조금 더 아까워집니다. 하지만 그 덕에 잠깐의 기분 좋음을 얻게 되었으니, 낭비는 아닌 셈이겠지요.



어릴 적에는 걷는다는 것에 박하지 않았었습니다. 친구와 한창 수다를 떨다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서로의 집 언저리를 몇 번이고 오다니기도 하였으니까요. 그때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기억이 나는 것은 서로의 집 앞쪽에 다다르면, "조금만 더 걸을까?"라는 말과 함께 뒤로 몸을 돌리던 그 장면들만 남아있습니다. 이미 어두워진 골목의 가로등이 간간히 친구의 얼굴을 밝게 비춰주곤 했었습니다. 한껏 웃기도, 때로는 눈물을 어둠에 숨기기도, 큰 소리로 화를 내는 대신 어두운 바닥으로 작게 분노를 떨어뜨리던 그 시절의 저는 지금과 무엇이 다를까요. 아마 그때의 '나'가 그리워 지금도 여전히 어두운 길을 걸으며 그때의 '나'를 잠깐 빌려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자 많이 걷기도 했었습니다. 힘들 때마다 한참을 걸어 바다를 보러 가던 아이였습니다. 다만, 가까운 바다는 부둣가라 식당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닷물의 짠내보다는 특유의 비릿한 냄새들이 더 강해 바다내음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 헤맸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헤매고, 눈 안으로 스며든 바다를 한 두 장씩 사진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그날의 일기에는 바다에 대한 글들이 가득했습니다. 늘 비슷한 문장으로 꾸며놓은 바다의 모습이지만, 그 문장 사이사이에 힘겨운 감정들 하나씩 하나씩 떨쳐냈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저는 걸으며, 아픔을 걸음걸음마다 떨어트리며, 지금의 '나'로 성장하였네요.



밤길을 걷다 다시 돌아 나오며 일부러 다시 동백나무들이 있는 곳을 지나쳐 걸어갑니다. 동백꽃은 떠나야 할 시기가 되면, 꽃송이채로 툭 하고 떨어진다지요. 길을 걷고 걸으며 마음을 짓누르는 무언가들을 조금씩 조금씩 흘려보내던 나의 모습을 반성합니다. 떠나야 할 때,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무엇에 미련이 남아 놓아야 할 것을 놓지 못하였던 것일까요. 조용한 밤, 툭 하고 떨어지는 동백꽃의 소리가 울리는 것은, 힘듦에 미련을 둔 나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과거의 '나'를 빌려오면서도, 현재의 '나'는 오히려 힘듦을 털어내는 것에 미숙합니다.



조용함이 묻어난 골목길로 들어서며 작은 타박거림에 귀를 기울입니다. 반복되는 리듬 속에 답답함을 하나씩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트립니다. 그렇게 걷다 가볍게 집으로 들어섭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래된 것이, 나를 찌를 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