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서는 알 리 없는, 모성애와 부성애
이모의 어깨에 자그마한 고개를 기댄 채, 빤히 제 엄마를 바라본다. 커튼으로 가려진 공간이지만, 작은 칭얼거림에 그 경계를 계속해서 오간다. 조카가 모유수유를 하던 시절, 여동생이 가슴 마사지를 받을 때면 조카를 안아 든 채 그 주변을 서성거렸었다. 순하던 녀석은 엄마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이모 품에서 잠이 들곤 했었다.
이번에는 마사지사가 출장을 오며 여동생은 병원에서 가슴 마사지를 받는다. 둘째의 모유수유를 시작한 동생의 속상함이 전해진다. 먹는 양이 적은 탓이다. 분유도 얼마 먹지 않더니만, 모유도 먹는 양이 많지 않단다.
"젖이 안 도는 거야?"
"아니, 이건 막힌 거야."
아기가 젖을 빨아야 막힌 것이 뚫린다던데, 유축으로는 별 효과가 없다 한다. 분유도 10ml 정도 먹고는 금세 잠이 들어버리는 둘째는 엄마 젖을 잘 물고는 있지만 먹는 양이 적단다. 첫째는 젖이 잘 안 빨린다며 모유수유를 할 적에 짜증을 부리곤 했었는데. 설소대 시술 후부터는 제 엄마 품에 얼굴을 파고들었다. 둘째도 시술해야 하는지 소아과 한 번 다녀와야지, 뭐- 첫째 때보다는 여유롭긴 하지만 얼굴이 밝지만은 않다.
"아, 언니가 네가 준 팁, 너무 유용하다 그러더라."
두 달 전, 언니가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젖이 잘 돌지 않는다는 고민에 여동생은 유축을 하기 전 아기 얼굴을 보고 오라는 조언을 해주었단다. 신기하게도 아기 얼굴을 보고 온 뒤면, 유달리 젖이 잘 돌았다며 모유 수유를 성공한 언니가 기뻐하며 내게 말을 했었다.
"그치. 다른 애기 울음소리만 들려도 젖이 잘 돌더라."
엄마만 알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여동생의 얼굴은 담담한 듯하다가도 옅은 미소가 깔려 있다. 아가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리는 시간을 잠시 떠올린 걸까. 내 애가 아니더라도, 다른 아기 울음소리만 들려도 젖이 돈다는, 얼굴을 보면 더 잘 돌기 시작한다는. 그리고 젖을 물릴수록 양이 더 많아진다던 여동생은 수술 후 소변줄을 빼자마자 제부의 손에 의지해 아기를 보러 걸어갔다.
"아기 얼굴 바라보면 무슨 호르몬인가 나온다고는 하던데. 호르몬인가, 아님 엄마의 본능 같은 걸까?"
엄마가 되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여동생의 말들이 신기하다. 임신 준비를 하던 시기부터 여동생은 '모성애'에 대해 종종 이야기를 했었다. 모성애를 지니고 있다고, 이 애정을 더 많이 나누고 싶다고. 첫째를 출산하고 돌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엄마가 되며 더 깊은 인내심과 충만해진 사랑을 쏟는 여동생을 바라보며, 내가 모르는 모습이었던 것인지. 엄마가 되며 바뀌게 된 것인지 궁금해 지곤 했다.
'아빠'라는 단어만 들어도, 아이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내 아이가 아님을 알면서도 제부는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를 좋아하는 편은 아냐-" 여동생이 말했던 제부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루 종일 일을 하다 와서 피곤할 법도 한데,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느라 지칠 법도 한데. 아이와 눈을 맞추는 제부의 눈에서는 꿀이 떨어지는 듯, 사랑스러움이 넘쳐난다.
어느덧 '이모'라는 단어가 들릴 때면, 나 역시도 고개가 돌아간다. 짧은 단어 속에 조카의 웃음과 안아달라며 두 팔을 뻗는 그 장면이 새겨져 있다. 이모 품에서 잠이 들었던 그 순간부터, 조카에 대한 사랑에 빠져버렸다. 천천히 젖어들듯, 그 사랑이 점차 깊어졌다.
어쩌면 엄마와 아빠는 아기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첫눈에 반했을지도 모른다. 첫눈에 반한 상대를 10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렸기에, 더 애틋하고 깊은 사랑이 되었을지도 몰라. 나로서는 알 리 없는, 모성애와 부성애다. 다만, 내가 빠진 사랑보다도 더 깊으리란 사실만을 추측한다. 사랑에 빠진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 조카의 얼굴 위로 나타난다. 사랑 위에서 피어나는 밝은 웃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