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

탱자 탱자 놀고 있다

by 무엇이든 씁니다

우리 집 길 건너편에 빈집이 하나 있다. 녹슨 대문은 굳게 잠겨 있고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 담벼락은 슬슬 내려앉는 중이다. 빈집답게 주변엔 풀이 무성하다. 집이 비어있으면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서 거리를 두기 마련인데 사람 심리가 웃긴 게 그러면서도 자꾸 기웃거리게 된다. 뒷집 할머니에게 여쭤보니 할머니네 큰댁이라고 한다. 그니깐 할머니의 아주버님과 형님댁. 우리 집도 그랬는데 옛날에는 큰 집, 작은 집이 가까이 사는 경우가 많았다. 큰 집이 얼마 전 저쪽으로 이사 갔다고 했다. (할머니의 시간 관념 상 최소 몇 해전이 타당하고, 저쪽이라며 손으로 가리킨 걸 보면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간 듯 하다) 왜 팔지 않았냐고 여쭤보니 할머니는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돌리시고 발길도 돌리셨다. 가까운 집안일인데 아예 모를 수는 없는 일이고 눈길도, 발길도 돌리신 걸 봐서 필시 재산 갈등이나 뭔가 사연이나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내가 아무리 빈둥대는 걸 즐겨해도 부러 빈집을 찾아 다니며 기웃거릴 정도로 부지런하지는 않다. 그저 빈 집이 내 산책길에 있어서 오갈때마다 자꾸 빈집을 기웃거리고 있다. 굳게 닫힌 대문 틈 사이로 들여다보기도 하고(풀이 무성하여 아무것도 안 보임) 깨금발로 담장 너머를 보기도 했다. 그 노력의 결과로 본 것은 겨우 감나무 한 그루다. 뭐가 갑자기 튀어나올까 봐 무서워서 더 도발은 하지 않았으나 너무 궁금해서 기웃거리던 중 요놈을 발견했다. 귤보다는 잘고 단단하고 땡그랗다. 원형에 가까워서 라임과 비슷한데 껍질에 눈에 보이진 않지만 보드라운 솜털이 있다. 나무 무시무시한 가시 틈바구니에서 무심하게 매달린 모양이 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가시들의 완벽한 수비에도 불구하고 요리 조리 잘 피해서 몇 알을 서리해서 집에 돌아왔다.


탱자 탱자 놀고 있는 탱자들


나무 도감을 뒤적여보니 탱자나무였다. (내 이토록 나무 도감을 자주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내가 아는 탱자는 '탱자탱자 논다' 할 때 탱자인데, 실물 탱자를 빈집 울타리에서 영접하게 되었다. 탱자를 창가에 올려 두니 또르르 구르는 모양새가 정말 탱자탱자 노는 것 같다. 이리저리 뒹굴거리다가 멈춰선 탱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달의 표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얼룩덜룩한 무늬가 내 눈에는 달의 크레이터처럼 보인단 말이지. 허허, 달을 품은 탱자라니! 옛말에 '유자는 얼어도 선비 손에 놀고, 탱자는 잘 생겨도 거지 손에 논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탱자를 업신여겼는데 옛날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리 봬도 탱자는 우주를 품은 몸이라고!


나무 도감 속 탱자나무


나무 도감 피셜 크고 날카로운 가시가 많아 (도둑 방지) 생울타리로 많이 심는 나무라고 한다. '탱자나무 울타리는 귀신도 뚫지 못한다'는 옛말이 있다고 한다. 하하, 그럼 빈 집에는 귀신은 없겠네,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뭔가. 에이, 괜히 쫄았네. 다음에 기웃거릴 때는 탱자나무를 믿고 쫄지말아야겠다.


탱자나무 무시무시한 가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