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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Oct 12. 2020

엉성한 울타리를 위한 변명

집 울타리 만들기

엄마는 왜 손님한테 일을 시켜?"


손님 아니거든, 일꾼이거든! 목공을 좀 배운 친구가 우리 집 울타리를 같이 만들고 싶다고 자청하여 왔다. 일꾼답게 커피 한 잔 마시고 바로 팔을 걷어붙이고 장갑을 꼈다.


톱질하는 친구, 구경하는 남편


나무는 몇 개월 전 당근에 팔레트 무료 나눔이 올라온 것을 보고 남편을 깨워 새벽같이 나가 구해다 놓았다. 재단된 방부목을 사도 얼마 안 한다고 하지만 몇푼이라도 아끼고 쓰임을 다한 나무에 다시 숨을 불어넣을 겸 팔레트 나무를 선택했다. 팔레트 치고는 제법 결도 살아있고 상태도 양호해서 트럭만 있으면 한 차 실어오고 싶었다. 마침 딸네 집 다니러 온 아빠가 불려 나와 나무에 박힌 못을 일일이 빼면서 손질하기 시작했다. 딸아이와 마침 놀러 온 동네 아이들이 너도나도 해보겠다고 달려들었다. 이럴 때 아빠는 안 된다, 위험하다 무작정 말리기보다는 요령과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한번 해보라는 쪽이다. 의외로 애들이 차분하고 야무지게 해낸다. 이거 하나 하는 데도 아이들의 기질이 드러나는 게 재밌다. 아빠가 오신 김에 바로 울타리를 세우려고 했는데 옆집이자 시공 소장님께서 울타리를 지지할 수 있는 구조물을 세워주신다고 하여 울타리 작업을 보류하고 나무를 툇마루 아래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할아버지와 손녀


장마가 길어지자 툇마루 아래 나무들이 다 썩을까 봐 걱정했다. 기특하게도 곰팡이도 거의 안 나고 잘 버티고 있었다. 그동안 고생한 나무를 햇볕과 바람으로 토닥여준 뒤 오일 스테인을 발라주었다.


일광욕 중인 파레트 나무


그러고도 한참 뒤 드디어 울타리를 만들게 되었다. 일꾼이 왔기에 들러리가 된 나는 툇마루에 앉아 고구마 줄기를 까면서 구경이나 했다. 목공을 조금 배운 친구와 목공을 전혀 배우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요령이 있는 남편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려가며 작전회의를 한 다음 울타리를 세우기 시작했다. 중간에 잘못 자르기도 하고 피스를 박다가 나무가 쪼개지기도 했지만 어찌어찌 세워갔다. 친구에게 쓰다가 문제 생기면 AS 할 거라고 했더니 늘 같은 울타리는 지겹지 않냐며, 망가지면 새로 또 만들면 된다고 했다. 그러게, 울타리 보수를 핑계로 친구 얼굴도 보고, 책상에만 앉아 있는 친구 콧구멍에 바람도 좀 넣어주고 안 쓰던 근육도 쓰게하고, 목공 기술이 녹슬지 않게 가끔 써먹을 일이 있으면 좋은 거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집 울타리가 엉성하고 불완전할 이유가 충분하다.



오일스테인을 덧 바르면서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진한 월넛 색깔의 울타리가 되었다. 서로 살짝 당황했으면서도 중후한 색이 부잣집 울타리 같지 않냐는 둥 들쑥날쑥한 색깔이 오히려 핸드메이드임을 증거 한다는 둥 자기만족에 빠져 낄낄거리다 보니 어둑어둑해졌다. 이 작고 어설픈 울타리 하나에 우리는 많은 시간을 쏟았고 꽤 많은 사람들의 손이 거쳐갔다. 품값을 따지자면 이게 얼마짜린가 가늠할 수 없고, 품질도 담보할 수 없지만 만드는 과정 하나는 즐거웠다. 예산 부족으로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만들고 가꾸어가는 재미가 솔솔 하다. 부족해서, 불완전해서 가족과 친구와 함께 하게 되고, 그래서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 집이 준공된 이후 본격적인 우리 집 짓기가 시작된 느낌이다. 전문가들이 하던 것을 아마추어인 우리가 이어받았을 뿐이다.


완성된 울타리
어디에 쓸 지 모르지만 오일 스테인이 남아서 칠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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