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엇이든 씁니다 Oct 15. 2020

알뜰한 햇빛 사용자의 독서

해를 쫓는 아이

보통은 카우치 포테이토처럼 소파와 거의 한 몸이 되거나 계단에 콕 짱 박혀 책을 읽던 딸이 어느 때부턴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책을 읽는다. 몸이 근질근질한가?


요기 다니엘 같은 재미있는 자세로 독서(자는 거 아님ㅋ)


아침 일찍엔 거실 큰 창에 기대거나 아예 툇마루로 나가 가부좌를 틀고 책을 읽는다. 그렇게 똥폼까지 잡고 아침 댓바람부터 진지하게 빠져드는 책은 수십 번은 읽었을 바로 만.화.책(요즘엔 슬램덩크)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삼시세끼 밥을 먹는 따님이 아침밥을 먹고난 다음 짱 박히는 곳은 거실 제일 끝이다. 나는 어른책, 아이책 구별하지 않고 같이 꽂아두는데 그래도 아직은 노약자에 속하는 딸이 책을 꺼내기 쉽게, 서가 끝에 주로 딸의 책을 꽂아둔다. 바로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위아래, 좌우를 브라우징 하며 기억이 가물가물한 책을 호명하여 재탕, 삼탕 한다.



오후가 되면 (나는 패밀리룸이라고 부르자고 주장하지만 딸은 실체적 진실에 가깝게) tv방이라 부르는 곳으로 이동한다. 이 자리엔 딸이 가장 좋아하는 의자가 있다. 이 의자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쿠션을 사용해서 책을 읽는다.



늦은 오후에는 아예 뒤뜰로 나간다. 아무 책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들고서. 뒤뜰이 주요 활동무대인 반려견 여름이가 와서 이렇게 좋은 날씨에 무슨 책이냐며, 책 따위는 집어치우고 만져달라, 놀아달라고 하는 통에 결국 책은 뒷전이 된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빛에 뽀사시해 보이는 여름이와 공놀이를 하다 모기가 달려들면 들어온다.



딸아이의 동선은 10월 현재 기준 동남향인 우리 집 채광과 정확히 일치한다. 딸은 해를 쫓고 있었다. 추분이 지나자 아침 나절엔 해가 툇마루를 지나 거실 문턱을 넘더니 점점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오가 지나면 tv방 남서쪽으로 낸 고정창에서 해가 사선으로 들어오고 늦은 오후 뒤뜰엔 쨍하지 않고 나긋나긋한 햇빛이 채워진다. 거기에 가을가을한 바람, 적당한 소음(개 짖는 소리, 새 소리, 할머니 집 끼익 문 여닫는 소리 등)이 있어 어느새 우리에게 책 읽기 명소가 되었다.


너 해를 쫓고 있는 거구나?


응, 햇빛을 모아서 책을 읽는 거야. 형설지공까지는 아니지만 일광지공이라도 하려는 건가? 이런 알뜰한 햇빛 사용자 같으니라고! 그런데 이런 집에 살면 이렇게 된다. 계절에 따라 그날 그날의 날씨와 시간에 따라 해의 움직임에 민감해진다. 그래야 빨래도 널고, 장독 뚜껑도 열고, 나무도 가려 심고 한다. 코로나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날이 많은데 이렇게 해를 쫓는 재미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책을 너무 못 읽었다. 집 짓느라, 엉뚱한 곳에 마음을 뺏기느라 책이 눈에 안 들어온다는 핑계가 많았다. 바야흐로 가을은 독서의 계절, 책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는 핑계가 나타났다. 딸은 해를 쫓고, 나는 딸을 쫓으리! 그러면 나도 자연히 알뜰한 햇빛 사용자가 될 것이다.


https://brunch.co.kr/brunchbook/ohmyhouse



매거진의 이전글 엉성한 울타리를 위한 변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