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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Nov 04. 2020

건축가가 머무는 자리

넓이가 아닌 깊이를 보는 시선

드디어 오셨다. 이사 온 지 5개월 만에 우리 집을 설계한 건축가 그룹이 우리 집에 오신 거다. 코로나 19와 서로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미뤄진 일정이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 어떤 공간이 되었을지, 그 공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 얼마나 궁금하셨을까. 시집보낸 딸의 집을 처음 방문하는 부모의 심정과 비슷할까? 먼저 2호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우리집으로 오셨다.


커피를 내리면서 자리를 안내했다. 집에 손님이 오면 우리가 내어드리는, 나름 VIP석이 있다. 큰 통창으로 뒷집 할머니의 텃밭과 작고 아담한 빨간 지붕 집이 보이고, 그 뒤로 야트막한 산이 있어서 나름 전망이 괜찮다. 마침 단풍이 한창이었다.


우리 집  VIP 석에서 보이는  풍경


그런데 정작 정 소장님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으셨다. 우리가 다시 자리를 안내해드렸더니, 그 앉은 자리가 좋다며 거길 고집하셨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풍경을 내어주시는 건가 생각했는데, 이유가 따로 있었다. 깊이감 때문이었다.


건축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집


보통 집을 구경하는 사람은 몇 평짜리 집인가를 제일 먼저 묻는다. 넓이를 묻는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건축가의 시선은 넓이가 아닌 깊이와 체적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 구석진 자리에 앉으면 시선이 벽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양한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인다. 제일 먼저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시선이다. 거실을 가로질러 문턱을 넘어 툇마루를 스친 다음 울타리를 넘고 이웃집의 마당과 길까지 확장해나간다. 이 작은 집에서도 조금은 아득한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시선이다. 그렇게 한번 나갔다가 다시 집에 들어오면 이번엔 상승한다. 오픈된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2층 복도를 서성거리다 긴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간다. 집의 체적을 느끼는 시선이다.



정 소장님은 이번에 우리 딸과 동갑인 딸을 데리고 왔는데, 그 아이의 평이 재밌다. 첫마디는 '우와! 넓다'였다. 사실 세 집 중에 우리 집 면적은 가장 작다. 그 다음 말이 더 재미있다. '와! 마트 같아!'라는 거다. 우리 집에 다녀간 많은 사람들의 평 중에 가장 재미있는 말이었다. 마트 같다? 물건이 많다는 말일까? 여기저기 조명이 많아서 그런가? 무슨 의미인지 전혀 감이 안 와서 아빠인 정 소장님께 해석을 부탁드렸다.


우선 우리 집은 계단이 집의 센터에 있고 계단 홀이 보이드로 뚫려 있는데 그 보이드를 통해 위, 아래, 사방이 동시에 보인다. 그래서 일반적인 집과 달리 개방적이고, 그래서 재미있는 공간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고 해석해주셨다. 우리 집에 오기 전에 바로 인근 이케아에 들렀다 와서 그런 비유가 나온 것 같긴 한데 아무튼 '그 건축가의 그 딸'이라고, 보는 눈이 다르다.


건축가들이 다녀간 뒤 우리 집 VIP석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머무는 곳에 보리수 나무를 옮겨 심었다. 보리수 나무는 정 소장님 댁 정원에서 보고 그 정원을 오마주 하는 느낌으로 따라 심은 나무다. 앞으로 우리 집에 오는 손님에게 건축가의 시선으로 깊이를 볼 수 있도록 그 자리로 안내할 계획이다. 지금 그 자리에 앉아 그 시선을 느끼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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