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리
컹컹 컹컹컹
여름이가 소란스럽게 짖어댔다. 2층 테라스에서 책은 폼으로 들고 서쪽으로 넘어오면서 부드러워진 해를 담요처럼 덮고 나른해질 대로 나른해져 있을 때였다. 이제 여름이가 짖는 소리만 들어도 대충 안다. 컹컹, 짖는 가운데 끄으응, 하는 소리를 내는 걸 보니 고양이가 나타난 모양이었다. 그러려니 하고 다시 책과 햇빛이랑 노닥거리는데...
빠지직.
움찔했다. 뭔가 기분 나쁜 소리였다. 마침 주위가 조용해서 그렇지, 생활소음에 섞이면 들리지도 않을 만큼 나직한 소리였고, 금속성처럼 거슬리는 소리도 아니었지만 한껏 이완되어있던 내 신경과 근육들을 긴장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빠지직, 빠지직.
소리만 듣고는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굉장히 차분하고 침착해서 더 소름이 끼치는 소리였다. 육감적으로 뭔가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내려다 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소리였다. 소리의 정체가 너무 궁금했기도 했고,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지 못하면 계속 귓가에 맴돌 것만 같았다. 좌우로 날뛰면서 화가 난 여름이도 진정시켜야 했다.
역시 고양이였다. 할머니 텃밭에 드나드는 하양이 조금 섞인 '대체로 검은' 고양이였다. 할머니 밭 구석진 곳에서 잔뜩 웅크린 대체로 검은 고양이가 소리의 진원지인 것은 분명했지만, 눈이 나빠 그런가 멀어 그런가 무슨 상황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쥐를 잡지 않았을까. 일단 사진을 찍고 줌으로 당겨볼 셈이었다. 찰칵, 소리가 나는 순간, 살점을 뜯다 만 고양이가 나를 째려보았다. 눈에서 날카로운 발톱이 튀어나올 것 같은 소름 끼치는 눈빛이었다. 살짝 뒤로 물러나서 방금 찍은 사진을 줌으로 당겨보았다. 얼핏 깃털이 보였다. 새를 잡은 것이다. 으...불쌍한 새...그러니까 빠지직, 하는 소리는 깃털이 뽑히거나 서로 부딪히고 구겨지면서 나는 소리였다.
으...어금니를 앙 물었다. 피 비린내가 내 코에 감지될 것만 같아서 얼른 집으로 들어와서 남편에게 사진을 전송했다(나 혼자 볼 순 없지...;;;) 근데 참 이상하지. 일이 손에 안 잡히고, 마냥 늘어져 있을 수도 없었다. 내 신경은 온통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꽂혀 있었다. 끔찍한 장면을 자꾸 보고 싶은 건 무슨 심리인지. 내 안의 잔인성인가요, 당연한 호기심인가요;;; 거실 창을 열면 5m 앞에서 바로 직관할 수 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진 않았다. 만찬을 즐기는 고양이를 방해했다간 피 뭍은 발로 나를 해코지 할 것만 같았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새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았다.
다시 테라스로 나갔다. 난간에 서서 조금이라도 가깝게 보겠다고 깨금발을 하고 눈을 최대한 찡그렸다. (그럴 바에는 1층에서 볼 것이지;;) 빠지직 소리와 함께 아주 천천히 미세하게 움직이는 고양이의 몸통이 음흉하고 징그럽게 느껴졌다. 이제 그만 봐야겠다는 생각과 그래도 무슨 새인지 확인하고 싶다(그래서 달라지는 건 뭔가;;;)는 호기심이 대치하고 있었다. 이제 고양이도 나란 존재가 신경 쓰이지 않는지 더 이상 올려다보고 저 할 일(새를 해체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더 이상 빠지직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깃털이 고양이가 가리고 있던 영역 밖으로 삐져 나오면서 깃털의 모양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길이와 무늬를 보니 꿩(까투리)인 것 같았다. (남편도 뒤늦게 깃털을 보고 꿩이 맞네, 했다) 그렇다. 우리 뒷산에 꿩이 많긴 많다. 우리도 여름이랑 뒷산 산책할 때 꿩이 푸드덕하고 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한 바 있다.(꿩을 직접 목격한 게 아니고 푸드덕 하고 날아가는 소리를 보아할 때 꿩인 것이 분명했다)
내가 엉뚱한 생각으로 분주한 사이, 고양이는 자기 일에 매우 몰입해서 진도를 빼고 있었다. 꿩으로 추측되는 새의 몸이 어느새 완전히 열려 활짝 벌어져 있었고, 고양이는 새의 내부를 핥고 있었다. (으...피를 핥는 건가;;;) 얼마나 정성스럽게 핥던지 그 모습이 잔인하기보다 어쩐지 정직하고 경건하게 느껴지기에 이르렀다. 아, 잠깐 아깐 잔인하다고 고개를 돌리더니 이젠 뭐라고요? 이런 급작스런 감정의 변주는 대체 뭔가요? 하긴. 길 고양이 입장에서는 저도 먹고 살겠다는 치열한 삶의 현장, 아니면 동물적 본성에 충실한 자연의 현장 아닌가. 동물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 따위가 감히 뭐라 할 수 있을까.
고양이가 쥐를 잡으면 인간 입장에서는 당연하고 고마운 일인데, 새를 잡으면 잔인한 존재가 되어 혐오 대상이 되는 현실에 고양이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쥐와 새에 대한 가치 기준은 인간 입장에서 생겨난 것이지, 고양이의 입장에서는 사냥의 난이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면 있을까, 둘다 같은 사냥감일 뿐이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동물의 세계를 함부러 판단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인간의 탐욕으로 동물을 이용하고, 그로 인한 부작용에 대한 책임을 다시 동물에게 전가하고 있는 그 업보 때문이라도. 우리도 반려견과 함께 살고 있지만, 동물과 인간과의 관계는 참 어렵다. 어쨌든 본의 아니게 이런 현장을 목격하게 되면서 마음이 무겁고 복잡했다. 일단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시각부터 반성해본다. 그리고 차차 생각을 정리하고 공부도 하는 것으로 오늘의 소동(?)을 마무리하려는데....아놔...빠지직, 하는 소리는 한동안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