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집과 헌 물건_외문 냉장고
새 집으로 데려갈 물건 1번은 바로 냉장고다. 우리 집 냉장고로 말할 것 같으면 10년도 넘은(정확히 12년 차) 500리터짜리 외문 냉장고다. 지금 같은 양문 냉장고 전성시대에 보기 드문 희귀 템이다.
그러고 보니 울 엄마도 외문 냉장고를 사용한다. 엄마의 냉장고는 20년도 넘은 외문 냉장고인데, 낡고 손때가 묻었을 뿐 아직 멀쩡하다. 가끔 집에 내려가서 보면 그마저도 텅텅 비어있다. 집 바로 아래가 시장이어서 매일 장을 보기 때문이다. 엄마는 밥 하다가도 아빠에게 고등어 한 손, 파 한 단 사 오라고 부탁한다. (물론 아빠는 장 보러 가서 시장 사람들과 놀다가 엄마의 독촉 전화가 와야 그제야 집으로 돌아온다) 어쨌든 시장 전체가 엄마의 냉장고인 셈이다. 대신 울 엄마는 2대의 김치냉장고를 사용하는데, 김장김치를 많이 담가서 1년 내내 이 사람 한 통, 저 사람 한 통 나눠주는 걸 좋아해서 그렇다. 엄마에게 김치냉장고는 1년 치 선물과 양식이 비축된 창고인 셈이다.
이번에 새 집에 이사 갈 때도 외문 냉장고를 그대로 가지고 갈 생각이다. 원체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내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집 짓느라 돈이란 돈은 다 끌어다 써서 새 냉장고를 살 여력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그 어떤 이유보다 분명한 명분은 외문 냉장고가 너무나 멀쩡하고 장점이 느~~~ 어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집 외문 냉장고는 12년 차이지만 지금까지 고장 한 번, 말썽 한 번 없었다. 어디서 주워듣기로 옛날 냉장고보다 오히려 양문 냉장고 고장이 잦은데, 그 이유는 양문 냉장고는 냉각기가 더 많아서 그만큼 고장 날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다. 암튼 나의 외문 냉장고는 문짝에 달린 선반이 한 번 부러졌을 뿐 아직 건재하며, 잘 돌아간다.
외문 냉장고는 넉넉한 품을 자랑한다. 나는 양문 냉장고를 사용한 적이 없어서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외문 냉장고를 쓰다가 양문 냉장고로 바꾼 사람들의 증언들을 모아 보니 양문 냉장고가 더 비좁게 느껴진다고 한다. 또 수박 한 덩어리, 김치통과 같은 큰 덩어리가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 두 칸으로 나뉘어 있으니 폭은 좁고, 깊어서 그런 것 같다. 나의 외문 냉장고는 그런 점에서 우월하다. 통이 커서 솥째, 냄비째로 보관할 수 있다.
나는 외문 냉장고가 쓰레기 배출을 줄인다고 믿는다. 양문 냉장고는 구조적으로 좁고 깊어서 물건이 한 번 들어가면 함흥차사라고 한다. 깊어서 순환이 잘 안 되고, 청소하기도 힘들다고 한다. 한 번 뒤쪽으로 들어간 음식들은 이사 갈 때나 나올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물론 외문 냉장고도 뒤로 간 음식은 썩어서 나온다. 하지만 그건 냉장고 탓이 아니라 나의 게으름 탓이다. 암튼 다년간의 관찰과 탐문을 통해서 얻은 잠정적인 결론은 양문 냉장고가 음식을 더 많이 들어갈지 몰라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몰라서 쓰레기를 더 많이 배출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묻는다. 냉장고가 작아서 불편하지 않냐고. 그럼 나는 불편하다, 고 대답한다. 냉장고는 늘 비좁다. 하지만 음식을 보관하기가 큰 냉장고는 없다. 양문 냉장고, 김치 냉장고, 냉동고를 다 쓰는 아는 언니도 냉장고가 부족하다고 하니까.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먹을 게 생기면 나눠 먹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 부르고, 친구들 모아서 나눠 먹기도 하고, 조금씩 포장해서 보내주기도 한다.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보다 빨리빨리 순환시키는 것이 음식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고, 냉장고에도 좋고, 지구에게도 조금이나마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도 웬만하면 작은 냉장고를 고집할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외문 냉장고의 고졸한 멋과 심플한 디자인을 칭찬하고 싶다. 요즘 양문 냉장고들이 대개 빛나는 메탈 소재인 데다 부피가 워낙 커서 싱크대 라인에서 불쑥 튀어나와 있는 반면 외문 냉장고는 싱크대 라인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선을 지킨다. 이런 모습이 요즘처럼 톡톡 튀어야 사는 세상에 미덕이 아닐 수 있지만, 나의 취향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의 외문 냉장고야,
12년 동안 우리 집에 와서 참 고생이 많았구나. 8년간 이사를 안 갔으니 8년간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했더라고. 쏴리! 너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이사 가기 전 포상휴가를 줄 생각이란다. 그전까지 냉장고 싹 비운다고 약속할게. 홀가분하게 잘 쉬고, 새 집에 가서도 잘 부탁한다. 너는 요즘 것들에 비해 크지도 깊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얕지도 않아서
우리에게 딱 적당한 크기란 걸 기억해줘. 네가 먼저 우리를 버릴 수는 있어도, 우리가 먼저 너를 버릴 일은 없으니 어디 갈 생각일랑 하지 말길 바란다. 그럼 오늘도 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