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집과 헌 물건 1__버리는 기술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매일 하는 일이 있다. 하루에 하나씩 물건을 버리는 거다. 각 방마다 3개를 비치해두었다. 쇼핑백은 누군가에게 물려줄 물건(상)을, 종이박스는 재활용할 물건(중)을,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는 말 그대로 쓰레기(하)를 위한 것이다.
이사 갈 때 한꺼번에 치울 수도 있지만, 그 방법은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이사 앞두고는 할 일도 많고 정신이 없어서 차분하게 물건을 정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래서 이사 가서 정리해야지, 하고 일단 다 싸 짊어지고 가지만, 결국 다 쓰레기가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어디 버리는 게 그리 쉬운가? 물건을 버리려면 시간적 여유,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미우나 고우나 어떤 시기를 함께 한 물건은 그 자체로 추억이고 감정이어서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 서서히 정을 떼야한다.
우리 집을 털면 트럭 몇 대 분량의 쓰레기가 족히 나올 것 같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우리 집에 쓰레기가 쌓인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한 집에서 무려 8년!!! 을 살았다. 이 말인즉슨 최소 8년 치 물건과 먼지가 쌓여있다는 말이다. 얼마 전 남편이 2층 벽장에서 발견된 옷 박스들이 봉인된 채 발견되었다. 박스를 뜯지도 못 하고 8년간 방치되었던 게다. 타임캡슐 열듯 설레는 마음으로 열었는데 얼마 후 100리터 쓰레기봉투 속으로 버려졌다. 아무리 레트로가 유행이라지만 일단 몸에 들어가지도 않을 뿐더러 옷이 삭아버렸다.
우리 세 식구 살기엔 큰 집의 크기도 짐을 불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빈 공간이 많다 보니 짐이 자꾸 들어오고, 한번 들어온 물건은 나갈 생각을 안 하고 그대로 눌러앉았다가 뒷방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온갖 물건들이 구석구석에 잠복해 있어서 어디서에 뭐가 있는 지도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
가장 문제는 잘 버리지 못하는 나다. 그러면서 물건 주워오는 것을 좋아한다. 안 쓰는 물건, 못 쓰는 물건, 버리는 물건이 발견되면 당장 쓸 데가 없어도 일단 주워왔다. 이렇게 물건은 수시로 입고되는데, 출고가 없으니 집이 금세 창고가 되었다.
과거는 잊고 나도 좀 미니멀 라이프로 살아보자. 그런데 사람이 쉽게 안 바뀐다. 버리려고 내놓았다가도 미워도 다시 한번, 하며 다시 들여놓곤 했다. 몇 년 동안 입지 않은 옷도 다시 유행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쟁여두고(유행이 돌아오더라도 사이즈가 안 맞을 텐데), 당장 필요 없는 가전 가구, 고장 난 물건도 왠지 나중에 필요하게 될 것만 같아서 끼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 된다. 집의 면적이 1/2로 줄어든다. 줄여야 한다. 액션 플랜이 필요하다.
작은 원칙부터 정했다. 한꺼번에 하려 들지 말고, 하루에 하나만 버리자! 그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범위를 넓혀 갔다.
맨 처음 망가진 가구, 가전제품, 아이 장난감은 무조건 버렸다. 지난 3년 동안 입지 않은 옷은 미련 없이 버렸다. 앞으로 2년, 1년 단축시켜갈 것이다. 괜찮은 옷은 동네 아이들과 나눠 입고, 나머지는 동네 재활용 박스에 넣었다.
우리 집 가장 큰 골칫거리는 책이다. 이삿짐센터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책이라서 한 소리 들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걱정된다. 책도 하루에 한 권씩 색출하기 시작했다.
우선 2권씩 있는 책을 모았다. 실수로 2권을 주문했거나, 선물 받았거나 해서 두 권씩 있는 책 10권을 모았다. 정가로 따지면 대략 20만 원어치도 넘었고 보관 상태가 최상급이라 기대가 컸는데 총 1만 3천800원을 받았다. 띠지도 그대로인 정가 33,000원짜리 '21세기 자본'은 2천 원이었다. 이거 거의 새 책인데요? 항변했지만, 재고보유량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고 했다. 무거운 걸 싸들고 갔는데, 다시 가져올 수도 없고, 눈물을 머금고 팔 수밖에... 정가 18,000원짜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 편'은 4천 원 받았다. 그다음 옛날 경영학도 시절 봤던 경영학 원서들을 모조리 처분할 계획이다.
왜 꼭 그런 것만 배우는가? 내가 못 버리니 딸도 못 버린다. 딸에게도 버리는 기술을 전수할 때가 되었다. 어찌 '버리는 고통, 버리는 기쁨'을 나만 느낄쏘냐! 딸의 책 중에서 우선 정리대상으로 무거운 그림책과 잡지를 지목했다. 딸아이는 울상을 지으며 완강히 거부했다. 아기 때 보던 그림책도 그대로 가지고 있겠다고 하고, 어쩌다 정기 구독하게 된 어린이 과학동아도 몇 년 치를 그대로 다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딸아이 역시 책을 두고두고 여러 번 보는 편이라서 무조건 버리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반 정도는 버려야 한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진통 끝에 최근 2년 치 잡지만 가져가기로 하고, 나머지는 다른 아이들이 함께 볼 수 있게 동네 피아노 학원에 가져다 놓기로 했다.
몇 달간 근면 성실하게 버리고 있다. 아직까지는 버린 티도 안 나고 짐은 여전히 산더미 같이 쌓여 있지만 하루에 하나라도 버리니 그만큼은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이렇게 버리고 버리다 보면 언젠가는 비워지겠지. 제라고 별 수 있나. 늦바람이 무섭다고 버리는 재미가 붙고, 점점 과감해진다.
버리는 고통을 알았으니, 이제 물건 좀 더 사려나? 아니면 버리는 기쁨을 알았으니 더 사고 더 버리려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