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엇이든 씁니다 Feb 05. 2020

피아노, 하마터면 버릴 뻔했다

새 집과 헌 물건 3__물려받은 피아노



요즘 가장 행복한 시간을 꼽으라고 하면, 딸이 피아노 치는 시간을 들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동네 친구 엄마에게 설렁설렁 배운 피아노 실력이 제법 늘어서 들을 만하다. 어느 날 아침 딸이 치는 피아노 연주를 듣고 눈물이 날 뻔했다. 쇼팽의 녹턴 2번은 내가 워낙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지만, 소리가 달랐다. 아침 일찍이라 소리를 줄이기 위해서 밟은 머플러 페달(가운데 페달)이 만들어낸 낮은 소리가 마음을 건드린 것이다. 그 후로 내가 좀 우울해 보이면, 딸이 묻는다.


엄마, 피아노 쳐줄까? 어떤 페달 밟고 쳐줄까?"


우리 집 피아노는 1년 전 동네 이웃에게 피아노를 물려받은 것이다. 그전까지 우리는 다른 친구에게 물려받은 디지털 피아노를 쓰고 있었는데, 하필 가장 중요한 '가운데 도'가 고장 나서 딸아이가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친구들이 하나밖에 없는 고명딸 피아노 좀 사주라고 했지만, 뭘 사주는데 인색한 나는 버티고 있었다. 시키지 않아도 피아노 연습을 꼬박꼬박 잘하는 딸을 보면 사줄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새 피아노를 사줬다가 피아노를 그만 두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물려받은 피아노에 전 주인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런 소식을 전해 들은 이웃 언니가 피아노를 바꾸면서 쓰던 피아노를 가져가라고 했다. 본인도 동네 이웃에게 물려받은 피아노이며, 좋은 피아노는 아니라며 미안해했다. 나도 이 동네에 사는 동안에만 쓰다 이사 갈 때 버려야지 생각하며 일단 가지고 왔다.  


그즈음 시에서 '찾아가는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하우스 콘서트 장소를 찾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조건은 피아노 3중주가 가능한 넓은 거실이 있어야 하고, 동네 주민들을 초대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디지털 피아노가 아닌 피아노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 조건이 바로 이틀 전에 갖춰진 우리 집이 딱이었다. 콘서트를 위해서 피아노 조율을 무료로 해준다고 했다. 오호, 완전 땡큐였다.


우리 집 거실에서 열린 하우스콘서트


콘서트를 앞두고 시에서 파견한 조율사님이 집으로 오셨다. 조율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때 피아노에 대한 나의 잘못된 상식을 바로 잡는 계기가 됐다.


"하우스콘서트 때 피아니스트가 온다는데, 좋은 피아노가 아니라서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이 피아노가 비싼 피아노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피아노 산업 전성기였던 1990년 무렵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피아노예요. 지금은 다 중국에서 만들어오거든요. 조율만 잘하면 계속 써도 괜찮아요. 꼭 비싸다고 좋은 피아노는 아니에요."


"이 피아노 쓰다가 이사 갈 때 새로 피아노 사줄까 하는데, 어떤 피아노가 좋을까요?"

"피아니스트 시킬 건가요? 그런 거 아니라면 새로 사지 마세요. 이 피아노 조율만 잘하면 계속 쓰실 수 있어요."


"아, 오래된 피아노가 좋다는 말이 있던데, 정말 그런가 보네요."

"무조건 그런 건 아니에요. 관리 상태에 따라 달라요. 피아노 부품도 일종의 소모품이잖아요. 많이 치면 소모품이 닳죠. 오래된 피아노라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에요. 자주 치고, 관리가 잘 된 피아노가 좋은 피아노예요."


"그럼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6개월마다 조율 잘해주고요. 피아노는 나무, 금속, 양모 이런 걸로 되어 있거든요. 직사광선과 특히 습기에 약하니까 그것만 조심하면 돼요."


"앗, 저희 집은 아파트보다 많이 습한 편이고, 에어컨도 안 쓰는데 피아노에 안 좋겠네요."

"아... 이 집은 괜찮을 거 같아요. 거실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습기 조절이 저절로 될 거 같은데도. 피아노에는 습한 것도 안 좋지만, 너무 건조한 것도 안 좋거든요. 어떨 땐 중앙난방 잘 되는 아파트가 피아노에 더 안 좋기도 하거든요. 이 집은 피아노랑 서재랑 같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오, 책과 피아노가 이렇게 궁합이 잘 맞는지 그날 처음 알았다. 이사 때마다 구박을 받는 책과 피아노가 좋은 파트너일 줄 몰랐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서재와 피아노를 거실에 배치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이렇게 물려받은 유서 깊은 피아노는 나의 외문 냉장고와 함께 일찌감치 착공 도면에 자리 잡았다. 피아노 자리는 우리 집 무게중심이자 상부가 오픈되어 보이드를 형성한 계단실이다. 조율사가 인증한 피아노도 있고, 피아노 자리도 있고, 층간 소음 걱정할 일도 없다. 이제 우리 집 전속 피아니스트만 배신하지 않으면 되는데, 이 불길한 느낌은 뭐지? 아마도 곧 도래할 딸의 사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땐 돈으로 꼬셔야 하나? 본격 사춘기가 도래하기 전에 빨리 이사 가서 피아노 소리 듣고 싶다.


거실과 다이닝룸 연결 지점에 자리 잡은 피아노


매거진의 이전글 매일 하나씩 버리기로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