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게 너무 완벽한 어그 부츠
‘생동하는 물질'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아니 띄엄띄엄 읽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가끔 생각날 때 한 번씩 들춰보고 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학술서치고는 쉬운 책이라지만 철학 공부가 안 된 나에게는 어려워서 책장이 쉽게 넘어가질 않는다. 그런 책인 줄 알면서도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지적 허영심을 불러오는 책 제목과 ‘물질에는 본래 생기가 없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광고 문구에 꽂혀서다. (뭘 새로 사는 걸 안 좋아하는 내가 유일하게 충동구매해대는 물건이 책이다) 그 무렵 나는 물건의 바다인 당근 마켓에 풍덩 뛰어들어 생기 있는 물건들을 신나게 만나고 있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제인 베넷은 주류 철학에서 무력하고 수동적이며 힘이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던 ‘물질’을 새로운 관점에서 탐구하며 ‘생기적 유물론(vital materialism)’을 주창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물질에도 힘과 활력이 있으며, 우리가 자신 이외의 물질들을 존중할 줄 알아야 ‘생동하는 물질’들과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에게 요즘 활력 넘치고 내가 존중하는 물건이 털부츠다.
우리 동네 같은 시골스러운 동네에서 털부츠는 필수품이다. 특히나 올 겨울처럼 북극 한파가 몰아치고 폭설이 내리는 날씨엔 더더욱, 아침저녁으로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 한량(=나)에게는 더더더욱 그렇다. 새 집으로 이사 오면서 너덜너덜해져서 물이 새는 겨울 부츠를 버리고 온 탓에 새 부츠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냉큼 새 부츠를 살 내가 아니지! 비포장도로가 난무하는 우리 동네에서 새 부츠는 너무 아깝다. 신발이 금방 더렵혀지고 망가진다. 구두를 신고 출근하던 시절에는 구두굽이 금세 망가져서 몇 개월마다 새 구두를 사야 했었다. 당근 마켓에 겨울 부츠 키워드를 등록하고 부츠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다양한 종류의 겨울 부츠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거듭하다가 어느 날 운명처럼 내 눈 앞에 나타난 물건은 바로 이것!
UGG Classic tall 초코 us7 사이즈
보관하면서 앞코에 구멍이 났네요ㅜㅜ
수선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
보는 순간 내 부츠가 될 운명이라는 걸 직감했다. 진짜 양털이 가득 찬 어그부츠에, 사이즈도 딱이고, 베이지도 아닌 초코색에 구멍 난 부츠라니!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부츠를 신겠는가. 이 부츠의 임자는 나밖에 없다. 구멍 난 부츠도 나에겐 낭만적이고 유니크하게 느껴졌고, 쿨쿨 잠자고 있던 나의 창작의욕을 불러일으켰다. 보아하니 앞코의 구멍이 크지 않아서 프랑스 스티치로 귀엽게 요리조리 꿰매면 오히려 포인트가 될 거 같았다. 경비실에 내려놓는다고 하셔서 바로 모셔왔다. 막상 가져와서 보니 꿰맬 필요가 없었다. 외피엔 구멍 났지만 안에 속피가 따로 있어서 바람이 직접 들어오지 않는 데다, 자꾸 보다 보니 구멍에 정이 들어버렸다. 뭐, 누가 내 발 쳐다볼 것도 아니기도 하고.
구멍난 부츠는 무기력하지 않다. 늘 생기 넘치고 활력 있는 모습으로 나를 겨울 산책으로 인도한다. 이 부츠가 아니었다면, 이 북극한파에, 또 오늘 같이 눈 많이 쌓인 길을 걸어다닐 엄두가 났을까. 이 부츠 덕에 추운 날씨에도 늘 즐겁게 산책을 나선다. 부츠를 신고 걸을 때마다 이 물건이 만들어지고 구멍이 나서 나에게 오기까지의 그 여정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이 구멍은 어떡하다 생긴 걸까? 구멍이 안 났다면 나와 만날 수 없었겠지. 구멍은 나와 부츠는 강렬하게 연결하는 고리다. 매일 산책에 나설 때마다 비대면 거래로 얼굴을 알 수 없는 부츠의 (전) 주인과 우리의 만남을 중계해준 당근 마켓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눈길을 걸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