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낙서가 있는 식탁
<안경>이라는 일본 영화를 다 보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카모메 식당>을 보고 ‘오기가미 나오꼬’ 감독의 팬이 된 나는 그 이듬해 새로 나온 영화 <안경>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DVD부터 사들였다. 하고 많은 날 중에 하필 과로와 술에 쩔은 밤에 이 영화를 보겠다고 틀었다가 바로 잠이 들었다. 그런 짓을 몇 번씩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지 않다. 아주 오래된 일처럼 아련하달까. 롱테이크로 잡은 심심한 풍경, 도대체 정체를 모르겠는 인물들과 딱히 서사랄 것도 없는 이야기, 아리송한 대사들이 느긋하다 못해 나른하고, 밋밋하고 지루하다.(그래서 좋다. 정신줄을 놓아도, 보다 잠이 들어도 원래 그런 영화라는 핑계를 댈 수 있어서 좋다) 그런 흐물거리는 기억에서도 ‘큰 테이블’이 있는 탁 트인 주방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큰 테이블에 모여 앉아서 맛있게 먹는 장면은 아주 디테일하게 생각난다.
민박집주인 유지 씨는 시골 민박집에 짱 박혀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정갈한 음식 스타일링을 선보인다. 여름이면 팥빙수를 팔러 오는(돈을 받지 않아서 판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지만) 빙수 아줌마 사쿠라 씨, 시도 때도 없이 민박집에 들르는 생물 선생님 하루나, 쉬러 왔지만 쉬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운 타에코, 그를 찾아온 제자까지 큰 식탁에 모여 앉아 텅 비어 있던 식탁에 하나둘씩 모여 앉아 조식도 먹고, 맥주도 마시고, 랍스터도 먹는다.
큰 테이블은 사람을 부른다. 사람을 초대하고 사람들을 옹기종기 모여 앉게 함으로써 장소를 환대의 공간으로 만든다. 큰 집에 대한 로망은 없어도 큰 테이블에 대한 로망은 있었다. 친구들 불러서 밥 같이 먹고, 커피도 마시고, 맥주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늘 큰 테이블을 원했다. 다닥다닥 어깨를 붙이고 끼어 앉으면 10명까지 앉을 수 있는 큰 테이블을 갖고 싶었다. 돈은 없으면서 눈은 높아서 마음에 드는 건 못해도 최소 돈백은 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요하지만 시급성에서 밀려 마음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하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친구들이 놀러 올 때마다 큰 식탁에 대한 아쉬움, 그리움, 로망과 욕망은 점점 커져갔다. 머릿속에 온통 식탁 생각뿐이었다. 이 마음을 어떻게든 달래야 했기에 당근 마켓에 SOS를 쳤다. '큰 식탁, 큰 테이블'이라고 키워드 등록을 하고 알람이 뜰 때마다 확인했다.
가로 1800짜리 식탁이 7만 원에 올라왔다. 한참 유행하던, 지금은 살짝 철 지난 두꺼운 원목식탁이다. 첫눈에 이거다 싶었고, 남편도 크기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작은 물건이 아니어서 직접 보고 결정하고 싶었다. 그래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정중하게 여쭤보았는데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다. 실례를 무릅쓰고 남편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찾아갔다. 인상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저녁 식사를 하다 말고 문을 열어주었다. 청소년인 아이들은 다 외출 중이고 내외분만 있다고 하셨다.
사진에서 봤던 그 식탁이 거실 창 끝에 있었다. 아는 분이 목공방을 하셔서 몇 년 전에 거기서 맞춘 거라고 하셨다. 이번에 세라믹 식탁으로 바꾸면서 내놓은 거라고 하셨다. 사람이 마음에 들면 그 사람의 물건까지 좋아 보이는 법. 물건을 따져볼 마음도 사라져 그냥 바로 들고 나오려는데 아주머니께서 식탁 아래에 아이들 낙서가 있을 거라고 알려주셨다. 무슨 낙서인지 보지도 않고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 상관없다고 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생각나서 식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보니 이런 깜찍한 서명이 있었다.
보아하니 둘은 ‘민’을 돌림자로 하는 남매 사이로 추정된다. 누나 오지민이 식탁 산 기념으로 선빵으로 서명을 했고(6.15) 이 사실을 하루 뒤(6.16)에 안 동생 오승민이 ‘나도 할 거야' 하면서 더 대범한 서명을 남긴 게 아닐까. 서로 경쟁적으로 식탁 밑에 기어들어가 목을 뒤로 꺾으면서까지 낙서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식탁 아래에서 남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새 상품이었으면 문제가 될 이 낙서들은 우리에게는 문제는커녕 더 유니크하고 더 깜찍한 포인트일 뿐이다. 아쉽게도 이 식탁을 들이고 얼마 후 코로나 19의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모임을 못하고 있지만 조만간 식탁에 모여 앉아 맛있게 먹는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