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낡고 빛 바랜 책
딸이 동네 언니한테 책 다섯 권을 빌려왔다. 다섯 권 중 네 권은 빌려온 그날로 다 읽었고, 몇 번씩 반복해서 읽었는데, 마지막 한 권은 몇 달이 가도록 아직 첫 장을 넘겨보지도 방치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600페이지에 달하는, 차마 시작할 엄두가 안 나는 두꺼운 책이었다. 찬밥 신세에도 불구하고 그 책은 이름처럼 에메랄드 그린 빛으로 우아하게 꿋꿋하게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해도 바뀌었으니 책을 반납하자고 했다. 한참을 노려보더니 추천해준 언니의 마음을 차마 배신할 수 없었는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책을 굉장히 빨리 읽는 딸인데도 책장은 매우 더디게 넘어갔다. 보통 재미있는 책은 중간에 덮지 못하는 딸인데 읽다 말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속도가 붙었는지 책장이 막 넘어갔고 무서운 속도로 나아간 끝에 마지막 장을 덮었다. 뭔가 강력한 힘에 빨려 들어간 듯 했다.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한참 동안 책을 껴안고 있었다. 안 읽었으면 큰 일 날 뻔했고, 손에 땀을 쥐게 한다며 땀이 맺힌 손을 내보이는 딸의 눈은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얼마간은 책을 품에 안고 표지를 쓰다듬고 책장을 뒤적거렸다.
책을 반납하려나 아쉽다고 했다. 딸은 책을 빨리 읽는 대신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편이다. 책을 사주기로 하고 알라딘 서점에 들어가 찾아보니 품절이라고 나온다. 다른 서점에도 없는 걸 보니 품절, 절판된 책이었다. (두꺼운 책이라서 잘 안 팔린 게 아닐까) 온라인 중고서점에도 재고가 없었다.(재미있는 책이라서 안 나오는 거 아닐까) 혹시나, 설마 하는 마음에 당근에 검색을 했는데...이거 실화입니꽈? 그것도 원서와 함께 내놓은 분이 있었다. 원서까지 산 거 보면 어지간히 좋아했나 보다. 지금은 대학생인데 중학교 때 너무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고 했다. 집에서 좀 떨어진 곳이었지만, 딸과 함께 한달음에 달려갔다. 책을 넘겨주면서 책 표지가 찢어져서 미안하다고 했다. 상관없다고 했다. (아니 절판된 책인데 이렇게 팔아주시니 우린 감지덕지죠,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혹시 책 안 판다고 할까봐 속으로 생각만 하고 말로 하진 않았다.) 그렇게 절판된 책을 구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딸이 말했다.
엄마, 아까 그 삼촌이 책이 찢어져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근데 난 이게 더 좋아. 이 책은 마법의 책을 찾아 시간 여행하는 이야기거든. 그래서 이렇게 낡고 빛바래서 뜯어진 모습이 더 어울려. 이렇게 너덜너덜하니까 왠지 이 책이 마치 마법의 책인 거 같은 느낌이야. 마법의 책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법의 책이라고 해야 할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