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무섭긴 무섭다

이벤트 똥손들의 이벤트

by 무엇이든 씁니다

딸이 무섭긴 무서운 가 보다. 우주 최고 귀차니스트인 나도 딸의 요구엔 마냥 게으름을 피우기가 어렵다. 진짜 싫어하는 것도, 진짜 못하고 평생 안 하던 짓도 하게 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유치원 졸업식 말고는 모든 학교의 졸업식을 불참한 프로 불참러다. 의례적인 행사를 질색팔색 한다. (아직까진 한 번뿐인) 결혼식도, (아직까진 하나뿐인) 고명딸 돌잔치도 안 했다. 양가 부모님 칠순도, 우리 세 식구 생일도 따로 챙기지 않는다. 사소한 이벤트에도 알러지 반응을 일으킨다. 예전엔 여자 친구 이벤트 때문에 나에게 고민 상담까지 했던 남편도 나와 살면서 보통의 지구 남자들과 달리 아주 편하게 살고 계시다.


그래도 하나뿐인 딸인데 촛불이라도 불어주자며 언제부턴가 시작했던 생일 케이크 촛불 후~~ 와 크리스마스 선물 배달이 우리에겐 이벤트 최대치였고, 생일엔 딸의 최애 음식인 초밥만 사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딸이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얼마 전 ‘빨간 머리 앤’을 보면서 자신의 잊었던 낭만성을 회복한 탓인지, 아니면 사춘기 초입에 들어선 기념으로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건지 이번 생일엔 서프라이즈 이벤트 좀 해달라고 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내 머릿속에는 그 어떤 간단한 아이디어, 아이디어 비스무리한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회사에선 아이디어 좋은 걸로 인정받던(그렇게 믿고 있는) 난데 어쩜 이렇게 속수무책일까. 나와 살면서 그나마 있던 이벤트 세포마저 완전히 퇴화된 남편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속절없이 시간은 흘러가버리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당일 저녁,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위기감이 밀려왔다. 며칠 전 사춘기 서막을 알리는 눈물범벅 아무말대잔치가 쓸고 지나간 후여서 그날이 재현될까봐 더 무서웠다. 돈으로 때울까, 하는 생각도 난생처음 해봤다. 친구들에게 동영상 축하 메시지를 받을까도 잠시 생각해봤지만 남들에게까지 파편이 튀게 할 수는 없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우리끼리 해결해야 했다. 딸이 남편과 나를 번갈아 보며 잘 되어가고 있는 거지?하며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으니 똥줄이 타들어 갔다.


안 되겠다. 뭐라도 하자. 웃기진 못해도 울리진 말자. 카톡으로 남편과 아이디어를 쥐어짰다. 남편이 꽃을 좀 사면 어떻겠냐고 했다. 케이크와 꽃이라. 주문한 건 서프라이즈였는데 세상 진부한 게 나오긴 했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일단 뭐라도 사놓고 시작하자. 그리고 추가적인 서프라이즈가 필요해. 그때 혜성 같이 나타난 아이디어가 몰래카메라. 그래 속여보자.


한 손엔 초밥을, 한 손엔 케이크를 들고 귀가해야 할 남편이 갑자기 일이 생겨 서울을 가게 됐다며 초밥은 내일 먹어야 할 것 같다며 딸에게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 (꺅! 이거 보고 뿜을 뻔! 연극영화과 지망했다가 아버지에게 혼나고 신방과로 가면서 연기에 대한 꿈을 접길 잘했다. 이런 발연기에 딸은 또 속아줍니닿ㅎ) 그나마 생일 디폴트인 생일 케이크 촛불 후~~ 와 초밥이 사라지자 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13세 아이라고 했다. 거기에 나는 한 술 더 떠 갑자기 먹을 게 없다며 라면을 끓여 먹어야 한다고 했다.(이 와중에 미친 나의 연기력 어쩔,,, 이 와중에 라면은 좋아하는 딸은 어쩔,,,) 내가 라면 봉지를 부스럭거리고 있는 동안 오늘 태어난 오늘의 주인공은 현실을 도피하고자 게임의 세계로 들어갔고, 나는 라면을 끓이는 척하며 현실감을 높였다.


그 사이 남편은 딸이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와 생애 첫 꽃다발을 사들고 뒷마당으로 들어와 밖에서 케이크 초 꽂고 촛불 붙이고 주방 뒷문을 열고 몰래 들어왔다. (와! 정말 쥐도 새도 몰랐음) 케이크를 들고 생일 축하노래를 부르며 세상 어설픈 표정으로 딸 앞에 나타났다. 밖에서부터 초에 불을 붙여서 들어온 탓에 촛농이 케이크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가느다란 초는 우리에게 90도 경배라도 하듯 반쯤 꺾여 있었다. 그 초의 모습이 애처롭고 남편은 어설퍼서 나는 웃겨 죽겠는데, 딸은 너무 놀라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저 세상 텐션으로 감격을 했다. 일단 다 타들어가서 불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촛불을 후~불어 끄고 식탁에 앉았다. 딸의 흥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불과 10분 전 세상 불행했던 아이에서 세상 행복한 아이로 변신한 딸은 초밥 중 가장 좋아하는 생새우 초밥부터 입에 넣고 오물오물 음미하며 자기 생애 가장 행복한 생일이라는 말을 열댓 번쯤 한 거 같다. 이쯤 하면 대략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생일 이벤트의 논공행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띵동! 산책 가자며 옆집 아이들이 딸을 부르러 왔는데 굳이 아이들에게 초밥 하나씩을 주겠다며 들어오라고 했다. 그럴 리가. 세상에 얼마나 좋았으면 아이들에게 초밥을 베풀까.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초밥 앞에선 애미애비도 없는 딸의 마음은 일시적으로 하해와 같이 넓고 깊어져 있었다.


아이고, 이렇게 좋아하는데 이게 뭐라고 못 해주었나, 어디 여행도 못 가고 친구도 마음껏 못 만나는 지금, 일상이 단조로우니 가끔은 이벤트를 하는 것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다가도 아냐, 아냐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날이 높아질 게 뻔한 딸의 기대를 충족시킬 자신은 없어서 다음 생일 이벤트는 6년 뒤 고등학교 졸업식 때 하자고 일단 시간을 많이 벌어 놓았다. 분위기에 편승해 딸이 그러자고 했다. 어찌 보면 세상 어렵고, 어찌 보면 세상 간단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자도 되겠다.


딸에게 주는 생일 꽃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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