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게 왔다

사춘기의 서막이 오르고

by 무엇이든 씁니다
아빤 나보다 여름이가 더 소중해? 엄마는 내 얘기는 듣지도 않고 아빠랑만 얘기하고 내가 가출해봐야 내 소중함을 알 거야? 왜 내가 아프다고 했는데도 대수롭지 않은 거라고 생각해. 내가 암에 걸려야 그때서야 아픈 거 알 거냐고! 내가 교통사고라도 나서 크게 다쳐야 정신 차리겠어? 내가 없어져 봐야 내 소중함을 알고 뒤늦게 후회하면서 눈물 흘리 거냐고! 난 너무 외로워. 엄마랑 아빠는 둘이 같이 예쁜 꽃길을 걷고 있는 거 같은데, 나만 혼자 회색 길을 걸어가는 기분이야. 왜 내 얘기는 들어주지 않고, 둘이서만 얘기하냐고.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외로운 지 아냐고! 엉엉엉(닭똥 같은 눈물 뚝뚝뚝)


가출, 암, 교통사고, 외로움 등등 너무 엄청난 말들이 갑자기 쏟아지는 바람에 나는 블랙아웃됐다. 갑자기 사고 회로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뭐라 대꾸할 말도 찾을 수 없었고, 달랠 기운도 없었다: 그냥 폭포 아래서 무자비하게 떨어지는 거센 물줄기를 맞는 것 같았다. 가만히 듣기만 했다.


때는 어제저녁, 매일 가는 동네 산책에 나섰다. 어젠 평소보다 좀 멀리 갔는데 중간쯤에서 딸아이가 자기 신발에 뭐가 들어간 것 같다고 했다. 자기 신발 안 신고 아빠의 구멍 나기 일보 직전의 헌 크록스를 끌고 나온 탓에 작은 돌이나 이물질이 들어갔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 신발과 바꿔주고, 나와 남편은 하던 얘기(별 얘기도 아니고 자동차 보험, 자동차세 이런 얘기였음)를 이어갔다. 옆에서 말없이 따라 걷던 딸이 모기 같은 소리로 '아무래도 발에 뭐가 있는 거 같아. 발이 따끔따끔해'라고 말하면서 멈춰 섰다. 나는 쪼그려 앉아 내 무릎에 딸의 다리를 올려놓고 양말을 벗기고 발바닥을 휴대폰 프레쉬로 비춰보았다. 발에 작은 가시가 박혀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발을 잡고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있어서 남는 손이 없었고, 남편은 반려견 여름이를 데리고 있어서 손이 없었다. 딸에게 직접 가시를 빼라 했고, 다행히 성공적으로 가시를 빼냈다. 그렇게 후련해진 딸이 '이 가시 여름이한테 줄까?'라고 농담을 했는데 남편이 '그걸 왜 여름이한테...'라며 여름이를 데리고 앞서갔다. 돌이켜보면 그때 뭔가 기분이 상한 거 같다. 하지만 우린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집에 오자마자 평소와 달리 갑자기 2층 자기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제야 뭔가 이상한 것 같아 따라 올라갔다. 나는 방문을 열고, 딸을 안고 ‘뭔가 속상했구나’라고 말하는 순간, 딸은 닭똥 같은 눈물과 폭포수 같은 말을 쏟아냈다.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지나갔다. 맨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얘 왜 이러지?' 최근 얼마간 우리는 사이가 너무 좋았던 거 같은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가시 하나 때문에 이런다고? 이 작은 일 때문에 가출이니 교통사고니 이런 엄청난 말을 쏟아낸다고?!!!’ 혹시 학교에서 뭔가 속상한 일이 있었나? 좋아하는 남자 애한테 차였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등교하면서부터 더욱 행복해했기에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뭐 우리끼리만 얘기한다고? 싸울 땐 싸운다고 뭐라 하더니, 이제 사이좋으니까, 그걸 샘내고 있네. 외동이라 그런가?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혼란스러웠다가 마지막에는 '아, 사춘기구나. 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따질 일이 아니구나. 그냥 속상하다는 거구나. 일의 경중을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닌 것 같다. 뭔가 휘몰아치고 있는 것 같다. 가시는 핑계일 뿐.’


내가 아무런 말도 안 하니 못 알아들은 줄 알고 더 큰 소리로 더 험한 말들을 퍼부었던 것 같다. 1층에 있던 남편도 들으라고 소리치는데 남편이 어쩔 줄 몰라 올라오지 않으니 더 난리 친 게 아닐까 싶다. 딸은 할 만큼 다 쏟아내니까 조용해졌다. 너무 피곤해서 빨리 자고 싶었다. 아무 말도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울다 지친 아이를 아기처럼 꼭 안고 급하게 마무리 멘트를 했다."네가 무슨 말을 하건 너는 엄마 아빠한텐 네가 너무 소중해. 아픈데 몰라줘서, 네 얘기 못 들어줘서, 네 마음 몰라줘서 미안해’ 어쩌고 저쩌고 중얼거리다가 딸의 침대에서 같이 잠이 들었다.


다음날 딸은 숙변을 본 것처럼 세상 맑고 가벼운 얼굴로 학교에 갔고,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주 아주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이제 시작인 거 같다. 나의 사춘기 때 내가 엄마한테 한 짓이 있으니 딸이 어떤 짓을 해도 나는 받아들여야 한다. 막상 닥치니 어안이 벙벙해진다. 옛날 나한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던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 단단히 붙들어 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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