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색의 완주를 기원하며

첫 가방이자 마지막 가방

by 무엇이든 씁니다

“이제 6학년인데 가방 바꿀까?”


와! 살다 살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내가 말하고도 내가 놀랐다. 왜냐? 난 잘 안 사주는 엄마다. 하지만 이마에 여드름 몇 개쯤 달고 다니는 사춘기 딸아이의 등짝에 앙증스럽게 매달려있는 귀욤 뽀짝한 핑크색 가방은 어쩐지 부조화스러웠다. 괜한 놀림을 받는 건 아닐까? 영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응? 갑자기? 아직 이렇게 멀쩡 한대. 삼촌이 엄청 튼튼한 가방을 사주신 거 같아. 좀 낡긴 해도 이 가방이 편하고 좋아.”


주위를 보면 4, 5학년이 되면 한 번씩 가방을 갈아타고, 많게는 두세 번씩 가방을 바꾸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같은 반에서 가방을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유일한 아이다. 특히 여자 아이들은 고학년이 되면서 애정 하던 핑크들에게 유치함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이별을 하고 무채색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런데 우리 딸에게는 아직 그때가 오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알아서 물건을 아끼고 오래도록 써준다면 내 입장에서는 너무 땡큐다. 일단 돈이 굳어서 좋다. 내 친구들은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너무 인색하다고 뭐라 하지만 딸에게 언제 와도 한 번은 올 물질적 욕망의 대폭발, 지름신의 영접은 최대한 늦추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그런 나의 철칙에도 불구하고 핑크 핑크 걸리쉬한 가방은 영 눈에 거슬렸다. 사실 애초에 내가 샀다면 사지 않았을 스타일이다. '핑크=여자'라는 사회적 문법, 여자 아이들 물건은 죄다 핑크 일색인 것도 마음에 안 들고, 핑크 가방 때문에 공주 취향으로 오해받는 것도 별로다. 나의 취향과 생각과는 다른 핑크 가방이 딸아이 첫 가방이 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딸아이 입학을 두 달 남짓 앞두고 의문의 택배가 도착했다. 가방이었다. 보낸 사람 정보도 없고, 보낸다고 연락을 준 사람도 없어서 용의자를 추려 범인(?!)을 추적하고 수소문하느라 애를 먹었다. 용의 선상에 오른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등 친인척, 딸아이를 친조카 이상 아껴주는 친구들은 죄다 아니라고 했다. 더 이상 짐작이 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미궁에 빠질 뻔했는데 끝까지 추적한 끝에 직장 동료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너무나 과분한 선물이어서 펄쩍 뛰었다. 우리의 친분 관계를 아무리 넉넉하게 따져도 너무 비싼 가방(초등학교 입학 가방의 가격은 미쳤다! 가방에 세트로 딸려있는 신발주머니는 가격만 올릴 뿐 딱히 쓸데없다!)을 덥석 받은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작은 선물이라면 모를까, 이건 못 받는다고 당장 환불하겠다고 난리를 쳤다. 나를 진정시키며 그분은 마지못해 몇 년 전 일을 상기시켰다.


딸아이 대여섯 살 때쯤인가. 주말에 회사 행사가 있어 아이를 데리고 출근했다. 현장이 어수선한 사이 딸아이가 위험한 상황에 노출됐는데, 그때 그분이 현장을 지휘하는 책임자였다. 천만다행으로 딸아이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와 딸은 곧 잊어버렸지만, 그분은 몇 년이 지나도록 그때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간간이 딸아이의 안부를 물어왔고,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가방을 보낸 것이다. 그때 그 트라우마 없이 건강하게 잘 커주어 너무 고맙다면서, 그 고마움에 대한 선물이라며 제발 받아달라고 했다. 결국 그 고집을 못 이기고 과분한 선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벌써 5년이 흘렀고, 가방도 6년째 건재하다. 지금은 나도 퇴사하고, 그분도 멀리 발령을 받아 가면서 서로 연락도 거의 안 하는 사이지만, 가방을 볼 때마다 그분이 떠오른다. 딸아이는 가방에 담긴 사연도 모르고, 그분의 이름, 얼굴 등도 기억에 없지만 가방 사준 삼촌이라며 가끔 아는 척을 한다.


첫 가방이 마지막 가방이 될까? 첫 가방이 끝까지 완주하고 졸업한다면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일단 딸아이 학교가 건강한 것 같다. 일단 유행에 민감하지 않고, 핑크색=저학년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런 편견으로 놀리지 않는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혹시 아이들이 지적하거나 놀리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용기 내어 뚝심 있게 메고 다닌다면 정신적인 근육이 튼튼하다는 것일 테니까 그 또한 환영할 일일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핑크 가방의 완주와 졸업을 기원하고, 난 오랜만에 ‘그분’에게 안부전화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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