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되야 만나는 사이
이맘때 만나는 친구가 있다. ‘이맘때’란 바로 지금, 돌나물이 날 때다. 돌나물의 길이가 손가락만큼 자라고 옆으로도 풍성하게 퍼져나갈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락을 하고 날을 정해 만난다.
우리의 매개는 돌나물 물김치다. 친정 엄마가 매년 봄에 돌나물 물김치를 담아서 보내주는데, 때마침 놀러와서 엄마의 물김치를 맛 본 친구가 완전히 반해버렸다. 이후 내가 엄마의 레시피를 배워서 둘이 함께 담그면서 비로소 친구가 되었다.
여러 가지 정황상 생물학적으로는 나보다 위는 틀림없어 보이지만 언니라고 부른 적이 없다. 서로 생년이나 학번 따위를 물은 적도 없고, 서로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다. 그냥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달까. 한두 번의 만남 속에 바로 라포가 형성되었다.
함께 음식을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재료 준비나 일하는 순서, 특히 간을 맞출 때 의견이 충돌하기 마련이다. 우리 엄마는 동네 친구들과 김장을 함께 하다가 이 사람 저 사람 한 마디씩 하는 거 정신 사납다고 몇 해 전부터 아빠와 둘이서 조용히 김장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손발이 착착 잘 맞고 아직까지 엇갈림이 없었다. 재료 준비와 역할 분담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다.
돌나물 준비는 내가 담당이다. 물김치 한통 담그려면 돌나물이 굉장히 많이 필요한데, 돌나물이 올라올 때부터 그 서식지와 성장 속도를 내가 눈여겨봐 두고 날이 더워 웃자라거나 꽃이 필 거 같으면 미리 뜯어놓기도 한다. 우리 집에서 김치를 담그기 때문에 미리 쑤어두어야 하는 찹쌀풀도 내가 미리 쑨다. 올해는 집 주변에 쪽파와 미나리가 있어서 미리 준비해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재료(오이, 당근, 고추, 마늘, 생강, 과일)는 친구가 다 사 온다. 올해는 홍고추를 안 사 와서 나한테 한소리 들었고, 나이 들어서 자꾸 깜빡한다며 봐달라고 했다. 재료 준비 방식(오이를 채 썰까 반달 썰까, 미나리를 대만 넣을까 잎도 다 넣을까, 고춧가루 농도와 단맛은 어느 정도로 할까 등등)은 레시피 주인인 나의 방식을 따르고. 간은 친구가 맡긴다. 둘이 함께 담가서 반을 나눈다. 이번엔 둘이 함께 아는 친구 것도 따로 챙겨 보냈다. 이런 것도 누군가 그럴까? 그러면 그러자! 하면서 결정된다. 그야말로 이심전심이다.
우리 둘이 친구라고 할 수 있는지 내 친한 친구가 물은 적이 있다. 서로 좋아하고(서로 낯간지러운 말로 확인한 적도 없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지만 아니어도 상관없음) 가까이 살지만, 자주 연락하거나 만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난 그렇다고 했다.
자주 만난다고 다 친구는 아니고, 자주 안 만난다고 친구 아닌 것도 아니지 않나? 나도 이런 관계는 처음이지만, 친구 관계란 친구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고 믿는다.
거의 연례행사로 만나다 보니 한번 만나면 서로의 근황과 사연, 그 사이에 켜켜이 쌓아두었던 감정들이 폭발한다. 자주 만나는 게 아니다 보니 스몰토크로 시동을 걸 시간이 없다. 바로 빅&헤비 토크를 시작한다. 교양 있는 단어를 선택하거나 에둘러 말하거나 예의 바르고 외교적인 수사법도 포기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맞장구치고, 서로 인생에서 배운 것들(주로 씁쓸한 맛)을 나눈다. 그렇게 탈탈 털어내면서 물김치를 담그고, 하루 이틀 뒤 잘 익은 물김치 한 사발 마시고 나면, 고구마 100개쯤 먹은 것처럼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린다.
그니깐 요약하면 돌나물 물김치를 담근다는 핑계로 시절 인연을 만나 잘 먹고 마시고 울고 웃다가 물김치 한 통씩 들고 헤어졌다는 말씀 되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