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가르치려다가
얼마 전 아이에게 너무 가르치려들지 말자고, 스스로 채워가도록 좀 비워두자며 브런치에 글까지 써놓고, 이게 무슨 언행불일치쇼람. 안 그러려고, 안 그런 척하려다가 폭망한 이야기....ㅎ
일요일 오후 베란다에서 독서 중인 이 어먼님에게 딸이 노트북을 내밀었다. 사회 숙제를 했는데 뭔가 부족하고 아쉽다면서 한번 읽어봐달라고.
웬만해서 숙제를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 콧대 높은 따님께서 웬일로 나에게 도움을 청했을까 싶었는데 그럴 만 했다. 숙제가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를 에세이로 쓰는 거였다. 얼마 전 4.19 혁명부터 5.18, 6.10 민주항쟁까지 자라락 읊어대서 나를 놀라게 했던 그 현대사 수업의 마무리인 듯했다. 나더러 쓰라고 해도 민주주의가 뭐였더라, 하면서 머리가 지끈거릴 주제인데 딸은 무려 고대 그리스 아테네까지 거슬러 올라가 시작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민주주의는 성인 남성들만 해당되는 것으로 불완전한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그럴지 모른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어쩌고 저쩌고...
와! 잘 썼다. 엄마한테도 어려운 주제인데, 이 주제로 이만큼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여기까지 말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왕 시작을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로 했으면 아테네 민주주의의 의미와 한계를 좀 더 쓰고, 뒤의 내용과 잘 연결되도록 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교과서에서 나오는 민주주의 정의 말고, 네가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네가 실생활에서 경험한 민주주의도 함께 적용해서 구체적으로 쓰면 좋을 거 같아. 학생회장 선거나 학생회 활동 같은 거 말이야...
처음엔 내 얘기를 듣고 문장을 다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점점 표정이 굳어지더니 조사 하나까지 고민하면서 공들여 쓴 첫 단락을 삭제해버리는 게 아닌가.
어, 왜? 엄마는 그렇게 시작하는 거 괜찮은데. 아테네 민주주의 불완전성으로 시작하면서 민주주의는 통일된 개념이 없고 나라마다 다르고 어느 시점에 완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계속 보완하면서 발전시켜야 한다, 뭐 그런 쪽으로 쓰려던 거 아니었어?
사실은 자기는 민주주의가 뭔지 아직 잘 모르겠고, 왜,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그럼 네가 경험하고 있는 학생회를 생각해볼까? 엄마 때는 학생회장을 지금처럼 선거로 뽑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직접 지명해서 뽑았어. 그러다 보니까 주로 선생님이 마음에 드는 학생, 공부 잘 하는 학생이 학생회장이 되곤 했어. 근데 지금은 어때? 학생들이 학생회장을 뽑잖아.
속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당위성이 아닌, ‘민주주의는 지키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혹은 경험한 민주주의?’ 와 같은 주제였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다. 어쨌든 너무 멀리 가지 말고, 딸이 쓴 에세이 안에서 수습을 해보고 싶었지만 어느 순간 삐끗하는 것 같았다. 설명하면 할수록 역효과가 나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되돌릴 수가 없었다. 결국 내 인내심이 바닥나면서 버럭하고 말았다. 이럴 거면 왜 나한테 봐달라고 한거야? 네가 봐달라고 한 건 어떤 의미였던 거야? 하면서 아이를 다그쳤고, 결국 그럼 네가 알아서 마무리하렴! 하고 난 그냥 자버렸다.
다음날 아침 밥상에서 나름 수습한다고 괜히 말 꺼냈다가, 결국 딸의 눈에서 눈물을 나게 했다. 엉엉, 엄마 말을 이해하고, 잘 반영해보려고 했지만 말을 너무 어려워서 다 이해할 수 없었다고.
딸이 책 좀 읽는다고, 나와 말이 좀 통하는 거 같으니까 아이를 너무 과대평가할 때가 있다. 무엇보다 문제는 내가 너무 가르치려고 들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과 방식에 대해서 너무 성급했고 아이의 반응을 살피고 아이를 기다려주지 못했다. 나도 어려운 걸 아이는 척척 해내도록 기대하고, 이왕 하는 거 조금 더 완벽하게 해내도록 압박했다. 반성한다. 다시 다짐한다. 제발 너무 가르치려고 하지 말자고! (근데 그게 참 어렵다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