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TV 있어요!

갑자기 TV예찬

by 무엇이든 씁니다

이 집에 TV 있어요?

우리 집에 처음 놀러 온 사람들에게서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딸이 소문난 책벌레여서 집에 TV 없는 줄, 책만 읽히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오노~~매우 잘못된 소문이다. 딸이 책벌레인 건 맞다. 딸이 책을 좋아하고 책을 많이 읽는다. 하지만 책만큼이나 TV도 좋아하고, TV도 많이 본다. 요일마다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있고, 그걸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하루를 보내고, 그 시간만큼은 철저히 사수한다. 그래서 집을 지을 때도 TV방을 먼저 만들었고, 그 방이 현재 우리 집에서 밀도가 가장 높다.


요기가 TV방인데, 우리는 TV를 보고 TV앞에서 딸은 숙제를 하고 있다


어쩌다 이런 소문이 왜 났을까

많은 사람들이 책과 TV는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TV를 좋아하면 책을 안 읽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TV를 안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책은 긍정적인 것, TV는 부정적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나도 한때 TV에 대해 꽤나 부정적이었다. 어렸을 때 TV는 바보상자라는 말을 듣고 자라기도 했고, 학창 시절엔 공부하기 싫어서 TV를 많이 봤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TV 소리도 싫어서 한참 동안 TV 없이 살았다. 다시 TV를 만난 건 같이 살게 된 사람 때문이었는데 TV도 없는데 인터넷 신청하면서 KT올레 3년 약정하는 걸 보고(같이 해야 싸서 그렇게 했다는 소리를 듣고)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못 들어주겠나 하는 심정으로 TV를 샀다. 그럼 눈치껏 살살 봐야 하는데 정말 TV에 딱붙이어서 홧김에 TV를 부숴버릴까 생각한 적도 있었고, 우리가 이혼하면 TV 때문에 이혼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혼 안 하고 잘(?) 살고 있는 이유는 출산과 함께 우리가 TV 앞에 대통합을 이뤘기 때문인데, 그니깐 무슨 말이냐먄 내가 아이를 낳고 젖을 물리면서 멍하니 보게 된 TV가 좋아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민은 깊어졌다. 나에게도 책 읽는 아이로 만들고 싶었던 욕심 같은 게 있었는데 그러려면 TV를 없애거나 TV를 못 보게 해야 하나, 고민을 했더랬다. 그런데 그게 정답이 아닌 걸 알게 됐다. 우리 동네에 TV 없는 집이 꽤 있었고, 그 아이들이 TV 자유지대인 우리 집에 자주 놀러오곤 했는데 옛날 어른들 잔소리처럼 정말 TV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닌가. 어찌나 몰입하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고, 어떻게 하면 우리 집에 놀러 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TV를 더 볼 수 있을까 궁리만 했다. 그걸 보면서 금지만이 대수가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다.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게 사람(특히 청소년)이기도 하고, 금지할수록 안 보이는 곳에서 몰래하게 되고, 오히려 맹목적으로 중독될 가능성도 높아보였다. 그렇다고 마냥 허용하는 게 맞나? 고민고민하다가 고민이 게을러져서는 에라 모르겠다, 같이 재미있게 보자가 되었던 것.


우리가 같이 보는 프로그램은 주로 예능 프로그램이나 요즘은 야구다. 드라마는 취향도 다르고, 볼때 집중을 요하는 반면 예능은 보면서 딴짓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심지어 우리 딸은 TV 보면서 수학 문제를 푸는 신공을 발휘한다. TV는 보면서 같이 떠들 수 있다. 원래도 궁금한 게 많으신 따님은 TV를 보면서도 그렇게 질문을 많이 하신다. 자기 지식(?)의 반은 TV에서 온다나?(반은 과학동아라고 해서, 그럼 학교는? 했더니 학교는 놀러 가는 곳이란다ㅎㅎ) 우리는 음악 프로그램을 꼭 챙겨 보는데 보면서 가족 모두가 떼창을 하고 때로는 춤도 추면서 논다.


우리 집에 잠시 머물렀던 친구가 우리가 TV 시청하는 모습을 보더니 TV의 재발견이라고 했다. TV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재밌게 보는 사람들을 처음 봤다는 것이다. 특히 남편과 딸의 폭발적인 상호작용은 매우 긍정적으로 보인다고 했다. TV 볼 때 둘은 정말 엄청 떠든다. 뭐가 저렇게 재밌을까 싶을 정도로 낄낄거린다. 요즘 같은 개인 미디어 시대에 자기 휴대폰 가지고 방으로 쏙 들어가지 않고 부모와 TV를 같이 보면서 웃고 떠드는 모습이 좋아보인다고 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또 그런가? 싶어서 우리는 일말의 걱정도 떨쳐버리고 열심히 TV를 보고 있다. 어제 저녁에도 새로 시작한 슈퍼밴드2를 같이 재미있게 보았다. 글쎄 언제까지 이런 시간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딸이 휴대폰과 방콕하기 전까지 TV타임을 즐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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