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the scratch
퇴사하고 1년 가까이 일을 쉬었다. 이놈의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땡 빚을 내서라도 멀리 훌쩍 여행을 떠났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었다.
뭐, 집구석도 나름 좋았다. 가족들과 땀띠 날 정도로 함께 붙어 지냈다. 딸아이가 원격 수업할 때 삼시세끼 밥 챙겨주고, 아침 저녁으로 반려견 산책시키면서 동속버네 한 바퀴 산책하는 게 나의 주요 일상이었다. 그렇게 세상 평화롭고 엄청 좋았...을뻔 했는데, 사는 일이 꼭 그렇지가 않다. 좋은 일이 있으면 꼭 안 좋은 일도 있다. (그 내용을 쓰자면 한 트럭도 넘지만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패쓰) 암튼 그렇게 속절없이 1년이 흘러갔다.
이제 돈벌이, 밥벌이로서의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통장 잔고를 보니 그럴 때가 되었다. 그런데 막막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그동안 난 참 운이 좋았다. 적극적인 의미로 '구직'이라는 행위를 한 것은 20년 전 딱 한 번 뿐이었다. 그 이후에는 아는 사람들에게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아 수락하는 형태로 일을 해왔다.
아까 얘기했듯이 사람 일이 좋을 수만은 없다.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그렇게 비교적 쉽게 일자리를 구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3년 주기로 번 아웃되었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농업적 근면성, 오너도 아니면서 오너와 같은 무게로 갖는 오너쉽과 책임감, 그리고 일자리를 제공한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일을 벌이는 좋아하는 탓에 늘 냅다 달렸다.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멈추질 못해 몸이 고장 나든 마음이 고장 나야 멈추는 식이었다. 그러면 퇴사하고 퇴직금 들고 떠났다가 돈이 떨어지면 돌아오기도 했고, 출산과 육아에 전념하기도 했다.
뼈와 살을 갈아 넣은 지난날의 시간들에 켜켜이 쌓인 네트워크와 평판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곧 나의 CV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걸 나이 오십 줄에 깨달았다. 그래, 좀 늦었다. 게다가 나는 더 이상 갈아 넣을 뼈는커녕 골다공증이 자연스러운 나이 오십을 바라보고 있다. 예전의 방식과 결별할 때가 되었다. 연줄 끊고, 시답지않은 계급장 떼고, 유효기간 끝난 평판은 미련 없이 내다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맨땅에 헤딩하고 땅을 파더라도 완전히 새롭게, From the scratch! 그래, 여기까지는 좋다. 좋아. 멋있어. 용기 있어.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응???
일단 다양한 구직 사이트, 커리어 관련 사이트에 가입하고 한동안 탐색했다. 구직광고는 많았지만 내가 원하거나, 나를 원하는 것 같은 일자리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의 용기와 결기와 다르게 나의 실상은 칠흑같이 어두운 망망대해의 한 가운데 표류해 있는 돛단배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