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와 초콜릿 공장"과 복권과의 상관관계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 사이 그 어디쯤

by 요가여니

친구가 언젠가 나를 보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를 수 밖에 없는데, 머리 속의 이상만 바라보면서 현실과의 괴리에 혼자서 괴로워하는 타입."

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나는 뼛 속까지 이상주의자였다.



어느 금요일 밤, 여느 때와 같이 칼퇴를 하고 맛있는 저녁을 배가 불룩하게 나올 때까지 먹은 후, 바람 솔솔 부는 거리를 산책을 하고 있자니 간만에 기분이 좋아 콧노래를 흥얼흥얼 부르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내 눈 앞에 복권집이 나타났다.

평소에 복권이나 주식같은 도박성 수익은 거들떠도 안 보는 나였지만, 그 날은 남편의 "복권 사줄까?" 한마디에 한껏 좋은 기분에 취해 "그래!"하며 현금을 받아들고 복권파는 가판대로 향했다. 복권을 사 본 적이 없어 슬금슬금 어색하게 다가가는 내 모습은, 마치 어두운 골목길에서 뒷거래라도 하는 듯이 한껏 작아진 모습이었다.

오 천원을 내밀고 "자동이요."라고 하니 5줄의 숫자 조합이 적혀있는 종이가 하나 내 손에 쥐어졌다.



평소에 길을 가다가 복권 파는 곳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으면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안 될 걸 뻔히 알면서 몇 천원 일지라도 소중한 돈을 왜 저런 곳에 쓰는 걸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날, 내 손 안에 몇 줄의 숫자가 들어오고 나니, 갑작스레 마음 속에 알 수 없는 희망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복권이 당첨돼 한꺼번에 많은 돈이 나에게 들어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이 단번에 해결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표정부터 밝아졌다. 항상 삐딱한 시선을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는 나였는데, 갑자기 모든 일에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첨되면 누구한테까지 얘기를 해야 할지, 먼저 어디에 돈을 써야 할지에 대해 신나서 떠드는 나를 옆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남편은 한 마디를 던졌다. "복권을 많이 사야 될 확률이 높아지지."


그 순간 나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떠올렸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안 봤어? 부자들이 그렇게 황금티켓 찾겠다고, 가진 돈 다 뿌리고 사람 써서 초콜렛을 엄청 많이 사들였는데, 정작 황금티켓을 찾은 사람은 누구야? 초콜렛 한 개 산 찰리가 찾았잖아."

"그래서?"

"그러니까 꼭 확률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거지. 내가 그냥 재미로 산 복권이 1등 복권일지 어떻게 아냐구~ 다 그렇게 현실적으로만 되는 게 아니야.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거라구."


내 말을 가만히 듣던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현실을 가끔은 좀 생각해! 세상이 그렇게 동화같지는 않아."





결국 주말에 맞춰 본 복권은 숫자가 하나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남편과 나눴던 대화는 내 머리 속에 인상 깊게 남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이상을 갈망하는 사람이었다. 평소에 주변에서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라는 말을 들으면 항상 나는 '현실은 뭐 하늘에서 뚝 떨어지나?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현실이라는 어떤 거대한 구조가 디폴트 값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게 현실이라고 믿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현실이라는 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다양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현실이라고 믿었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어디에서든지 평범하지는 않았나보다. 대학을 다닐 때 문학도라면 무조건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복수전공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했지만 설마 복수전공 안 한다고 굶어죽겠어, 하고 단일전공으로 졸업했다. 취직하고 나서는, 일이 없어도 있는 것처럼 야근도 조금씩 해야 한다는 말에 '그런 문화때문에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근무환경이 이 모양인거다' 라고 생각하고 일을 다 끝내면 칼같이 정시퇴근을 했다.

유연근무를 장려하는 공지는 계속 오지만 눈치보느라 아무도 사용하지 못할 때, '쓰라고 만든 제도인데 내가 왜 못 쓰나' 하는 생각에 결재를 올리고 승인을 받아 일찍 출근하고 조금 일찍 퇴근하기도 했다. 결혼하기 직전에 이제 혼자만의 자유는 끝났다고 충고하는 어른들의 말은 가볍게 무시했고, 지금도 배우자의 유무와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들을 주저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평소에 무슨 말을 해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어차피 안 돼.',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그냥 다른 사람들이 사는대로 사는 게 제일 나아.', '다 그렇게 사는거야.' 어떤 말을 해도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 노력해도 바뀌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 이미 늦은 거 아니냐고 비꼬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해 봤자 소용없다고, 괜히 힘빼지 말라고, 남들은 그렇게 못해서 안 하는 줄 아냐고, 정신차리라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항상 있지 않은가.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나름 도움을 주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지만, 이런 뉘앙스의 말들은 듣는 사람의 기운을 한없이 빠지게 한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현실'이라는 굴레를 형성하는 것 아닐까. 이상에 다다를 수 없지만 조금이나마 한 발자국을 내딛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무심코 가볍게 던지는 그 말이, 하나씩 하나씩 쌓여 이상으로 가는 길에 거대한 벽을 만드는 것 아닐까.



복권이 결국 꽝이었던 것처럼, 내가 원하는대로 살겠다고 아등바등해도 내가 싫어하는 그 말처럼 현실은 언제나 녹록지 않다. 공부하는 것, 돈을 버는 것, 속은 철 없는 어린아이이지만 어른의 역할을 하는 것 모두 쉽지 않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내가 그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깨지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좌절하며 엉엉 울기도 한다. 사람을 너무 믿어 다치기도 하고 또 소중함을 몰라봐 사람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다며 동화되거나 현실의 편에 서서 그저 방관하고 싶지는 않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을 한 발작 물러나 멀찍이 바라보면서 이러쿵 저러쿵 평가를 하는 것은 쉽지만, 계란의 입장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벽을 허무는 역할을 하지는 못해도 그 벽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나라는 작은 존재가 변화를 만들기는 어렵겠지만, 남들 눈에는 허무맹랑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계속 이상을 좇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건 안돼'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현실의 무게에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숨통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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