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리뷰
Nomadland. 번역하면 ‘유목민의 땅’?
그녀 이름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녀가 나오는 영화는 다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사실 나는 그녀의 영화를 딱 하나 봤다. 아니, 과거에 본 것들이 몇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지금 기억하는 영화는 이것 하나다. 쓰리 빌보드. 감독과 연출도 무척 훌륭하지만 만약 그녀가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이 영화에서 똘끼 충만한 엄마 역을 미쳤다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해냈다. 대체 불가라는 말이 딱 맞다. 머리에 늘 두르고 있는 반다나도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다.
허지웅의 영화평이 아니라도 디어 헌터의 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비주얼이다. 얼굴도 많이 닮았다. 디어 헌터에서 줄거리, 주제, 주연 다 고려 않고 그냥 딱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빨간색 수건을 이마에 묶고 눈이 게게 풀린 상태로 러시안룰렛 게임에 빠져있던 한 남자, 닉을 선택할 것이다. 전쟁이 망가뜨린 인간의 영혼을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딱 그 얼굴일 것이다. 쓰리 빌보드의 맥도먼드와 디어 헌터의 닉은 폭력에 의해 인생이 내려앉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더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으니 다음으로 미루고, 지금은 프란시스 맥도먼드라는 배우에 대한 입문으로 쓰리 빌보드를 강력 추천하면서 마무리하고 노매드랜드로 다시 돌아간다.
일단 나는 노매드랜드가 아닌 노마드랜드라고 부르고 싶다. 유목민을 우리는 ‘노마드’라고 써왔지 ‘노매드’라고 써오지 않았다. 여주인공 배우 말고는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영화를 보라 간 나는, 제목을 ‘미치지(MAD) 않은(NO) 나라(LAND)’라고 해석했다. 영화를 보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수많은 하우스리스를 양산한 미국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반어적 명명인가 싶었다. 매드랜드(MADLAND)를 노매드랜드(NOMADLAND)라고 지칭한 것이리라.
영화 후반부에 가서야 아하, 노마드(NOMAD)! 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래, 노마드랜드(NOMADLAND), 펀이 선택하는 삶은 노마드, 유목민으로 살아가려는 거구나! 이후 나는 이 영화를 말할 때 노마드랜드라고 한다. 내가 했던 처음의 오해에 대한 항변 내지는 변명의 의미도 있지만, 노마드랜드라고 불러야 더 느낌이 살아난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영화의 원작인 제시카 부르더의 책은 노마드랜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있다. 대체 노마드랜드를 왜 노매드랜드라고 발음하고 표기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미국 사람들이야 미세한 발음 차이나 사회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공감으로 노매드랜드라고 발음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겠지만,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다르지 않은가. 원작처럼 노마드랜드로 발음하고 표기하는 것이 영화의 주제와 느낌을 더 살려준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펀의 나이가 몇 살로 설정되었는지 정확히는 모르나 아마도 65세 전후인 것 같다. 펀이 언니와 대화하는 장면에 그녀의 결혼 스토리가 언급된다.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한 남자를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지게 되어 그를 따라 고향을 떠나 석고 공장의 도시 임파이어에 정착하여 40여 년을 살아온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을 병으로 잃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 평생 변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 부부는 헤어진 그 순간에 서로 무척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을 떠나보낸 펀이 지독한 상실감에 시달린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평범한 아줌마 피셜로 말한다면, 두 사람의 사랑이 시종일관 유지되었을 리는 없다고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사랑 변치 않아요’는 싸구려 광고에나 나오는 말이다. 인간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이 서른만 돼도 깨닫지 않는가. 이 부부도 40여 년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갈등과 다툼이 있었을 것이다. 그 마을에도 매혹적인 F컵의 젊은 처자, 친절하고 생기 넘치는 젠틀맨, 바람처럼 왔다가는 떠돌이 난봉꾼들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 다 그렇듯 온 마을에 소문 낭자한 사건들도 꽤 벌어졌을 것이다. 두 사람이 마을 사람들과 벽을 쌓고 그 모든 사건사고와 완전 무관하게 살았을 리는 없지 않은가. 자식 없이 딸랑 둘 뿐이었기에 사소한 갈등도 서로의 마음에 깊은 상실감과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상대방 말고는 대체할 사람이 없기에 더욱 상대만 바라보게 되고 그로 인한 상처 또한 깊었을 것이리라. 그러나 이들은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서로에게 이어진 끈을 끊지 않고 40여 년을 견뎌온 것이다.
이렇게 끈을 놓지 않은 데에는 두 사람이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인격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나는 주장하는 바이다. 만약 폭력과 마약, 섹스 중독 등 결정적인 결함을 가졌다면 두 사람은 서로 잡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크고 작은 결함이 있었을지언정 싸움과 화해를 반복할지언정 그럭저럭 견딜만하여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중년의 어느 시기에 문득 서로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임을 깨닫게 되고, 이 나이까지 내 옆에 있어 주는 단 한 사람이라는 고마움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 들게 되면 부부는 남은 평생을 해로하게 된다. 노년의 문턱에서 굳이 서로를 떠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 지금 우리들의 남편이나 아내가 마음에 너무 안 들고 밉더라도 기본적인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당신은 상대를 언젠가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다. 옆에 있어 주는 이 사람에게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갈등과 원망을 조금 더 참고 견뎌보기를 권한다. 아, 물론 폭력이나 도박 등 심각한 인격장애가 있을 경우에는 하루빨리 헤어지는 것이 낫다. 하지만 좀 게으르고 좀 무심하고 좀 답답하고 술을 좀 자주 마신다고 해도 일단은 참아주는 것을 권한다. 언젠가는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게 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돌아온 사랑은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깊고 진실할 수 있다.
아무튼...펀은 남편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진 상태에서 난데없는 이별을 당했을 것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이 영화 감상의 첫 번째 포인트이다. 이 부부가 결혼 생활 내내 시종일관 깊은 사랑을 유지한 것이 아니라 격정과 분노와 아픔의 시간을 견딘 후 더 깊고 성숙한 사랑을 하게 된 노년의 어느 날, 이제 둘이서 서로를 챙기며 인간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서로에게서 느끼며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가던 어느 시점에 암이라는 저승사자가 이들을 덮쳐버렸을 것이다.
남편을 덮친 암은 자비도 없고 인내심도 없었다. 그녀에게 준비할 시간 따위 주지 않고 남편을 하늘로 보내버렸다. 펀은 남편이 죽어가는 과정을 다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퇴락한 도시에서 이웃이나 제대로 있었겠는가. 오롯이 그녀 혼자 견뎌내야 했을 것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아마도 남편과 함께 가고 싶었을 것이다. 간호하는 내내 남편이 죽으면 바로 따라 죽을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남편은 결국 죽었고 그녀는 차마 따라가지 못한 채 또 죽음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펀의 상실감은 얼마만큼이었을까? 그 고통은 얼마나 깊었을까? 사방을 둘러봐도 오가는 사람 없이 폐공장과 폐허만 늘어서 있는 마을, 이제 곧 전기도 수도도 끊길 황폐한 도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남편도 떠난 텅 빈 집에 홀로 앉아 마을을 볼 때마다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 깊은 상실감은 내 능력으로는 상상이 잘 안 된다. 나는 아직 이런 한계치를 경험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나에게도 닥칠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 겪게 될 것이다. 이럴 때 가장 가까운 선택지는 자살일 것이다. 자살이라는 것은 이렇게 강력한 고립감과 상실감 속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자살하는 사람의 심경을 살아있는 자들이 추측만 할 뿐 제대로 알 수는 없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죽는 것 말고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느낄 때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펀은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떠나는 것을 선택한다. 떠나긴 하지만 이전 삶에 대한 미련은 많아서 몇 가지 중요한 물건들, 스무 살 무렵 아버지가 사주신 그릇 세트라든가 하는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떠난다. 영화가 전개되고 길에서의 삶이 이어지면서 펀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쌓여있는 미련들을 하나씩 떼어놓게 된다. 그릇 세트는 깨지고 낡은 물건들은 고장이 난다. 이렇게 미련이 떠난 빈자리는 새로운 친구들과 새로운 경험이 채워간다. 펀은 새로이 채워지는 것들에 마음을 크게 두지는 않는다. 영화의 종반에 펀은 다시 모든 미련을 훌훌 털고 다시, 제대로 길을 떠난다.
영화는 밴을 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 모든 상실과 고립을 견딘 후 마을을 떠나기 시작하는 것, 즉 새로운 시작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희망찬 시작은 물론 아니다. 차마 죽을 수 없으니 일단 떠나보는 정도의 시작이다. 쇄락한 마을을 떠나는 것이라 집도 팔릴 리 없고 모아놓은 돈과 연금도 적다 보니 다른 마을에 집을 장만해서 떠날 형편이 아니기도 했을 것이다. 딱히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곳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밴을 장만하여 일단 떠나자는 마음을 먹은 것으로 보인다.
이 출발이 노마드 실습이라고 한다면 영화 후반에 집에 들렀다가 다시 떠나면서 펀은 본격적인 노마드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이 노마드 실습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수많은 노마드들을 만나면서, 아마존 단기 노동, 캠핑장 관리 등 비정규 육체노동을 하면서 그녀는 점점 웃음을 찾아가고 그동안의 삶과는 다른 새로운 영역으로 열린 문을 찾게 된다.
펀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다 노마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성격에 노마드적인 면이 있을 것이다. 마음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성격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녀의 결혼이 그렇다. 미국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같은 마을에서 만나 결혼하여 같은 마을에서 부모형제 가까이 산다고한다. 펀처럼 오로지 사랑을 믿고 타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존이나 이익보다 마음을 따르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자식이 없는 이유가 나오지 않았으나 펀의 성격으로 보아 생기지 않아서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잉태되지 않는 2세를 굳이 의학을 힘을 빌려 잉태하려 노력하지 않는 성격일 것이다. 이런 성격이기에 결국 노마드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가고 마음이 내는 소리를 따르는 삶이 몸에 익은 사람으로 보인다.
펀이 아마존에서 일하는 장면은 희한하게 사람의 마음을 끈다. 무념무상의 단순 작업으로 시간을 보내면 그만큼의 급여가 지급되는 지극히 담백하고 솔직한 하루를 보내면 삶이 얼마나 심플할까 싶다. 언젠가는 저렇게 일을 해보고 싶다. 생계를 위해 힘겹게 하루하루 일하는 분들이 들으면 뭔 개소리냐 하겠지만, 365일 내내 그렇게 일하라고 하면 싫지만, 3개월 정도 한시적 노동은 해보고 싶다. 내 나이 65세쯤 되면, 그런 노동을 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자랑이 될 것도 같다. 밥하고 빨래하는 집안일은 하기 싫지만 물류센터 포장, 골프장 청소, 놀이공원 청소, 캠핑장 관리 같은 활동적인 노동은 꼭 해보고 싶다.
소위 먹물들이 은퇴하면 몸 쓰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다. 평생 책상에 앉아 글 쓰고 서류 작업하고 숫자 계산했던 사람이 은퇴하면 다시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아 진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 펀이 길을 떠나는 장면에서 나는 기대와 호기심으로 약간은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후반에 펀이 길을 떠나는 장면에서는 온갖 감정이 다 올라와서 실로 먹먹하다는 표현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펀 앞에 놓인 그 긴 길,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주는 감정은 고독, 두려움, 막막함, 의지, 강인함, 자신감 그리고 체념과 절망, 그리고 아직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한 느낌들이다.
안타깝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희망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런 장면에 희망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삶에는 희망이라는 것이 어울리지 않고 적절하지 않은 대목도 있다. 바로 이런 대목이다. 희망이 어울리지 않다고 해서 괴롭거나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냥 희망을 말하고 느끼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먹먹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희망보다는 고독과 가까워져야 하고 상실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고 혼자라는 것은 매 순간 명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루어갈 때 인간은 궁극적으로 성숙하는 것이다.
성숙이라는 것이 꼭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이 고독과 상실의 연속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 다가올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성숙일 것이다. 그것을 느끼게 해주는 엔딩. 그래서 먹먹하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길 위의 장면들에서 펀이 본격 노마드로 살아가면서 겪게 될 많은 일들이 암시되어있다. 스웽키의 죽음, 길 위에서의 그 죽음은 펀의 최후를.......?!
영화를 보는 동안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미국에서 흑인 노마드는 없다는 것이다. 흑인이 밴을 몰고 다니며 차에서 숙식을 하고 미국 전역의 도로를 달리는 상황은 불가능하다는 것. 경찰과 주민들이 가만두지 않는다고 한다. 수시로 검문하고 경찰서 동행을 요구하고, 심지어 주민들에게 총격을 당할 수도 있다고 한다.
에라이, 이런 젠장! 미국은 매드랜드 맞네. 자유민주주의? 택도 없다. 여전히 계급사회다. 미국에서 흑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여전히 백인의 절반도 안 된다는 증거다. 흑인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인권인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다는 것 아닌가? 실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런 실체적 사실이 존재하는 한 미국은 계급사회다. 21세기의 계급사회, 매드랜드 맞다. 영화 제목을 노매드랜드로 해도 되겠다. 안 미친 나라.
그렇다면, 우리처럼 누리끼리한 인종은 미국에서 노마드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우리가 미국까지 가서 노마드가 될 이유는 1도 없지만,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들 중에는 노마드를 꿈꾸거나 노마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니 한 번 생각해봄직한 주제이다. 황인종이 밴을 몰고 미국 여기저기 떠돌며 산다면 주민과 경찰, 도로에서 만난 다른 드라이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음... 아마도 흑인에게만큼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경계를 당할 것은 분명하다. 경찰 신고를 당할 수도 있고 폭행이나 추방을 당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백인들은 오래전부터 아메리카에 건너온(혹은 끌려온) 흑인보다 얼마 전 건너온 아시아 인종을 더 경계한다는 말도 있다. 찢어진 눈과 낮은 코로 무엇을 탐색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오리무중이라 더 경계한다는 것이다. 흑인보다 경제력과 사회적 위치가 조금은 더 높은 듯하니 총기 소지도 더 많이 할 것이고, 그 총이 언제 자신들을 겨눌지 모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 아무래도 우리 아시아 인종 역시 미국에서 노마드가 될 수는 없겠다.
펀이 아끼던 그릇들을 깨어버림으로서 펀으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에서 걸어 나오게 하는 데에 일조를 하게 되는 인물인 데이브는 결국 정착을 선택한다. 데이브가 돌아간 가족은 지극히 따뜻하고 평화롭다. 그 지극한 평화로움 속에서 펀은 잠시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데이브가 아들과 나란히 앉아 피아노 연주하는 모습을 본 펀은 망설이지 않고 그 집을 떠난다. 할리우드식 해피엔드에 익숙한 감성을 가진 나로서는 펀이 그 집에 정착하여 안정된 사랑 속에 노년을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냥 그렇게 끝나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결말이었다면 맥도먼드가 주연을 맡았을 리가 없다.
나는 노마드가 될 수 있을까?
답 : 아니, 나는 될 수 없다. 사람 앞날 모른다지만, 나는 한데서 못 잔다. 샤워도 매일 해야 한다. 무엇보다 밖에서는 변도 못 본다. 난 정주민이다. 그러니 나는 밴보다는 집을 사야 한다.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는 안정된 나의 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