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 ‘집(또는 하우스 또는 홈)’을 중심으로

by 연잎

※ 주의 : 본인의 다른 리뷰가 다 그렇지만 이것은 특히 더 주관적이고 더 우아하지 않음.


봉 감독의 다른 영화들인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와 마찬가지로 기생충 역시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계급’을 얘기하고 있다. 이 중 ‘기생충’은 우리 사회의 계급을 가장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설국열차’는 기차의 머리칸과 꼬리칸이라는 극한 대비로 계급을 부각했지만 직접적이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판타지라는 포장을 한 겹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SF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에 SF가 장르적 바탕이다. 기차라는 설정도 비현실이다. 달리는 기차에서 살아가는 인류라는 설정은 머나먼 미래의 어느 디스토피아이지 현실의 우리 모습과는 꽤 거리가 있다. 그래서 설국열차에서 계급은 판타지라는 옷을 입은 비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반면 ‘기생충’에서 계급 문제는 21세기 한국이라는 시・공간 설정으로 손에 닿는 듯한 현실감이 있다. 그뿐 아니라 담장의 안쪽, 집 내부에서 모든 사건이 벌어지게 설정되어 있다. 내 집, 내 가족 사이에 비집고 들어온 계급 갈등인 것이다. 그래서 매우 직접적인 계급이자 피부에 와닿는 갈등으로 느껴진다.


박사장의 경이로운 호화주택은 분명 박사장이 주인이고 그의 아내와 두 자녀의 ‘홈’이지만, 이 주택이 ‘홈’인 사람이 박사장 가족만은 아니다. 박사장보다 더 오래 그 주택에 거주한 집사 문광도 이 집을 ‘홈’으로 인식했음이 분명하다. 문광은 안주인인 연교보다 그 집에 대해 잘 알고 그 집에 얽힌 기억과 애정도 더 많다. 정서적으로나 역사적으로는 집사가 그 주택의 진짜 주인일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등기를 가진 자가 법적 주인이다. 집사 문광은 등기를 가진 자가 어느날 갑자기 나가라고 하자 면 군말 없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집이 자신의 ‘홈’인 것을 넘어 유일한 거주 공간이었던 집사의 남편은 그가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이 알려지지만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그 집을 떠나지 않을 수 있다. 떠날 마음도 없었을 것이다. 문광이 쫓겨나가도, 박사장 일가가 갑자기 이사를 나가도, 이 남자는 그 지하 공간을 계속 점유할 수 있다. 그러니 거주 기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집사의 남편이 그 집의 주인일 수도 있다. 집사와 남편은 그 집에서 동고동락하며 오랜 시간 살았고, 그 집 말고는 갈 곳도 없다. 그 집은 이들에게 하우스이자 홈인 것이다.


기택 가족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기정이 처음 발을 들인 순간 그 집은 기정과 그녀 가족들의 집으로 접수 들어가시게 된다. 물론 기정이 처음부터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정은 작은 틈이 보일 때 그것을 놓치지 않고 언제든 비집고 들어가 자신의 발을 뻗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인물이다. 왜 그런 준비가 되어있느냐고? 이유는 단순하다. 그녀와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이 사람이 살기에 너무 험한 집이기 때문이다.


반지하이고 창밖에서 누가 소변을 보면 그 소변이 튀어 들어오는 집이다. 언제나 습하고 축축한 공기가 떠도는 집, 화장실과 부엌과 방이 제대로 구획되지 않은 집, 휴식은커녕 병이라도 얻을 것 같은 집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반지하에서 합법적으로 벗어날 길은 매우 묘연하다. 온 가족이 모두 실직 상태이기에 불가능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지금 기거하는 곳이 나에게 해가 되는 공간이라면 어떻게든 기어 나와 다른 곳으로 촉수를 뻗는 것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의 본능일 것이다. 이런 생존 본능에 따라 기정과 기우, 그리고 기택과 충숙까지 온 가족이 박사장의 호화 주택으로 촉수를 하나씩 뻗어가게 되는 것이다.


기택 패밀리가 박사장의 집으로 한발 한발 몸을 집어넣을 때마다 짜릿한 긴장과 쾌감을 느낀 사람이 나뿐은 아닐 것이다. 그토록 능청스럽고 뻔뻔한 가족 시트콤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웃음의 끝이 결코 시원하거나 달콤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적 느낌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도 없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표정 변화를 영상으로 찍어서 본다면 어떨까? 이런 ‘긴장성 웃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봉 감독의 탁월한 능력이겠지 싶다.


우리의 긴장은 헛되지 않았다. 박사장의 호화주택을 자신의 집, 자신의 홈으로 생각했던 모든 사람들이 지하에서 올라오고 아랫동네에서 올라와 부엌에 진출하고 거실을 점유하다가 다시 쫓겨 내려가는 과정을 밟은 후 그 갈등은 결국 폭발해버리고 만다. 모두가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 이들이 입은 상실과 상처에서 그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일 수 있다.


그래도 좀 가려본다면, 박사장 가족이 아닐까? 가진 자였던 박사장. 가진 것이 가장 많은 사람이 잃을 것도 가장 많다. 자신들이 소유한, 자신들에게만 점유권이 있는 공간인 줄 알았던 자신의 집에서 초대형 참사를 겪어야 했던 박사장 부부가 가장 큰 데미지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잃고 집은 쑥대밭이 되었다. 박사장의 호화주택은 당분간은 참사의 현장으로 방치될 것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가 비교적 싼 값에 인수하여 참사의 흔적을 싹 지우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되팔겠지만 당분간은 폐허가 될 운명이다.


박사장의 집이 이렇게 풍비박산된 것은 기택 가족이 테러범 들이라서가 아니다. 문광과 그 남편이 뻔뻔한 기생충이라서가 아니다. 박사장 패밀리는 문광과 기택 가족의 도움 없이 그 집에서의 삶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광과 기택 가족은 박사장 패밀리의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인 도움을 주었다. 연교가 도우미 없이 집안일을 다 해낼 수 없을 것은 물론이고, 박사장이 기사 없이 스스로 운전하면서 대표 이사로서의 업무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아이들 또한 기정과 기우 같은 과외 교사 없이 키워낼 수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그 집에 드나들며 박사장 가족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은 이들 말고 더 있었어야 했다. 실제 그 정도의 부잣집에는 도우미가 한 명이 아니다. 집사가 있고 그 집사가 다 해낼 수 없는 험하고 잡다한 일을 하는 도우미가 한둘은 더 있다. 그리고 아이들의 가정교사도 아이 1인당 적어도 셋을 될 것이다. 둘 합하면 여섯 내지 여덟, 또는 열 명을 넘길 수도 있다. 주부인 연교에게 방문하는 요가 선생님이나 어학 선생님도 있을 것이다.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도 주 1회는 방문할 것이다. 적어도 10명, 많으면 2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매주 그 집을 드나든다.


이렇게 보면 박사장의 주택은 작은 회사다. 많은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출퇴근을 하고 부엌 등 일부 공간을 점유하여 업무를 보는 곳이다. 가장 사적 공간이어야 하는 화장실의 경우, 그 집의 화장실(안방 쪽 부부 화장실을 제외하고)은 20여 명의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공용 화장실에 가깝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공중 화장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그 주택이 박사장 가족만의 것일 수 없는 가장 단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기택의 반지하 집에는 가족 외에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다. 누군가 방문한다 해도 기택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다. 기택의 친구인 민혁이 수석을 들고 잠시 들어오긴 했지만 자리에 앉지조차 않았다. 기우와 민혁이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잡은 곳은 동네 슈퍼 앞 간이 파라솔이다. 기택의 반지하 집은 기택 가족이 실로 온전히 점유하는 공간인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택 가족이 자신들의 의식주와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타인의 도움이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움을 요청할 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 돈을 줄 테니 와서 일을 해달라고 해도 굳이 반지하집에 가서 도우미를 해줄 사람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무도 그곳에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사장 패밀리는 본인들의 의식주를 비롯한 일상생활을 해결하는 데에 타인에게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다. 이들이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더 그렇다. 즉 가진 것이 많을수록 타인에게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인간 가족이 집이라는 공간을 배타적으로 점유하는 것과 인간 가족이 가진 부는 서로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집이 크고 가진 것이 많을수록 그 가족의 집은 그 가족만이 점유할 수 없게 된다. 거의 필연적이다. 이는 많이 가진 자일수록 기본적인 의식주를 타인의 서비스에 의존한다는 의미도 된다. 인류는 늘 그래 왔다. 과거 귀족 계급은 옷도 자기 손으로 입지 않았다. 자기 입에 음식을 넣는 수저질 정도만 본인이 했을 것이다. 가진 자의 일상은 이런 서비스가 공급되지 않을 경우 무너질 것이다.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제대로 해결하기 힘들 것이다.


박사장의 호화 주택은 사실상 박사장 가족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주택이 제대로 된 집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투입된 많은 사람들과 실질적 공유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나 집을 잔뜩 오픈해 놓고는 보안시스템과 비밀번호를 만들어 관리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긴장이 느슨해진 좁은 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작은 벌레가 어느 순간 몸집을 키워 집을 물론 가족들까지 모두 삼켜버리지 않는가.


그러니 부자들이여 조심하시라.

당신의 그 호화주택은 절대 당신만의 것이 아니다.

당신의 그 부가 절대로 당신 자신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듯, 당신이 쌓은 그 부에는 타인의 희생과 고통과 절망이 버무려져 있듯, 당신의 그 집은 언젠가는 당신이 고의적으로 또 미필적으로 초래한 눈물의 바다, 당신이 아닌 타인이 흘린 눈물이 모여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절망의 바다에 삼켜져 버릴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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