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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홍 Feb 02. 2020

아내 생일,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

아무도 해답을 모르지만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할법한 끄적임

올해 아내 생일도 함께 맞이했다. 

12시가 지나 날짜가 바뀌자마자 두근두근 가벼운 서프라이즈로 선물을 전달하고 축하하며 포옹하는 따스하고 행복한 시간. 


앞으로도 항상 이렇게 축하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 다음 생일까지 웃는 얼굴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삶을 꾸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옆에서 어떤 풍파도 막고 괴로운 일은 없도록 지켜주고 싶다.


이렇게 말로 하기엔 낯 간지러운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돌바닥에 스멀스멀 스미는 냉기와 같은 생각과 마주하고야 말았다. 그야말로 돌로 된 바닥에 추락한 것처럼 갑작스러운 충격이었다.



좋은 마음가짐이군,
그러려면 네가 살아있어야만 하겠지만.


귓속말을 소곤거린 냉기는 순식간에 사라졌으나 나는 황망해졌다.

그 차가운 목소리는 나의 오감을 일깨워 죽음을 두려워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사람은 여러 미래의 위험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동물이다. 

코 앞에서 실제로 위협을 가하지 않은 위험도 단 몇 프로의 확률만 있다면 걱정할 거리가 되곤 한다. 아직 걸리지 않은 암, 당하지 않은 사고, 노쇠해졌을 때 겪을 가난 같은 것들.

그러니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대단하게 유별난 일은 아니다. 사람의 사회가 범죄나 질병을 예방하고 더 좋은 음식을 찾아 먹고도 부족한 영양소를 약으로 생산하는 등의 시스템을 발전시킨 건 사람이 미래의 위험을 걱정할 줄 아는 동물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리라. 

밀려오는 파도 같은 죽음을 조금이라도 늦추고자 하는 다수의 소망과 두려움이 만든 사회 시스템.


다만, 나는 존재가 소멸되는 본능적 공포에서 더 나아가 고통스러운 현실에게 떠밀릴 아내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걸 떠올리자 순간적으로 앗 차가워, 하고 느낄 만큼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내게 있어 고통은 차가운 감각과 유사하다. 날카로운 칼에 손가락 끝이 베었을 때도 나는 앗 차가워, 하고 느꼈었다.


매일 기사에서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마주하며 산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에 무엇을 생각했을까. 설마? 정말 죽어? 그런 생각밖에 못 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짧고 허망한 찰나의 순간 의식이 끊기고 이 세상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

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나를 대입한다. 산 자의 일시적 변덕이라고 누군가 비웃기 딱 좋은 행동이지만 의식은 멈추지 않고 그 순간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매일 출근할 때 타는 버스가 사고가 난다. 일을 하다가 일터에서 불이 난다. 퇴근길에 집으로 걸어가는 길 어두운 길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습격을 당한다. 택시를 타고 정지선에 멈춰있는데 음주운전 차가 갑자기 내달리다 덮친다. 


죽음을 맞은 나는 신문 기사에 성씨와 나이, 성별로만 기재되어 짤막하게 세상에 알려진다.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넘기면서 무심하게 보아질 딱 그만치의 헤드라인으로. 범죄와 연루된 죽음이라면 같은 지역, 같은 성별, 비슷한 연령의 불특정 다수 사람들이 몸서리치고 혀를 차는 그런 기사 속 피해자 인물 A로 기억 속에 머물다가 시간 속에 사라질 것이다.


신문 속 인물 A인 나에겐 아내가 있다.

내 죽음을 기사로 읽는 이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상상한 모든 죽음의 순간마다 아내를 떠올린다. 

안돼, 목숨줄만 끊지 말아 주세요, 아직 나는 죽을 수 없어요, 집에서 영문도 모르고 내 퇴근을 기다릴 내 아내는 어쩌죠.


나는 너무 신파적인 생각은 하고 싶지가 않다. 그런 생각만 했다면 내 삶은 현실 속에서 너무나 슬픈 일 투성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생각도 멀리 두고 내게 없는 개념인 것처럼 살고 싶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그렇지만 아내의 생일, 아주 오랜만에 죽음을 생각했다.

나의 죽음을 상상하고 곱씹고 떠올리며 사라질 내 고통보다 혼자 세상에 남겨질 아내의 고통을 생각했다. 함께 사는 집에서 날 기다리다 누군가에게 비보를 전달받고 허물어지듯 무너질 아내의 삶을 생각해버린 것이다.


내 아내는 나의 장례식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공식적인 위로도 받지 못하고 내 혈연에게만 할당될 위로 속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진 않을까. 유언장 하나 남기지 못한 내 죽음으로 그동안 함께 꾸려온 터전과 고양이들, 재산권을 다 빼앗기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처지가 되어버리진 않을까.


(이럴 수가, 쓰고 보니 더 신파적이네. 갑자기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원래 절절한 글은 쓰고 나서 부끄럽다. 차라리 애정표현을 담뿍 담아 끈적이는 글이 낫겠다고 후회 중.)


신파에서 호흡을 바꿔보자면 미래를 읽는 능력은 없는 나는 아내에게 닥칠 고통과 내가 겪을 황망함, 후회를 줄이기 위해 숨이 붙어있을 때 최대한 준비를 해두는 수밖에 없다. 남길 것의 유무와 상관없이 주변 정리를 자주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가 내 죽음으로 받을 현실적 타격을 줄일 방안을 찾는 노력을 깊고 넓게 계속하는 것.


죽음 앞에서 어떤 것도 보장받지 못할 관계라고 슬퍼만 하기엔 아내와 살아갈 삶은 가져볼 수 있는 행복이 더 많다고 믿는다. 아내가 내가 글로 써서 남긴 기억 외에 더 많은 것을 가져가길 바란다. 그 이후에도 생을 꾸려나갈 수 있더라고 생각하길 바란다. 절망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지독한 슬픔을 느끼더라도 또 회복해가는 과정만 겪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나는 차분하게 생이 허락하는 시간 내에서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내 볼 심산이다.


물론 지속적인 기록으로 우리 중 한 명만 남았을 때 더 오래 기억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도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부의 시선으로만 써봤지만 이성애자 부부도 가족의 죽음이 가장 두렵고 고통스럽지 않을까.

그러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세간에서 보편적이라 불리는 부부들과의 공통 지점이 아닐까 감히 생각한다. 보이는 양상만 조금 다를 뿐이지.


아내 생일에 죽음을 속닥인 나의 이성은 이렇게 결심을 하라고 차가운 손으로 내 마음을 어루만진 모양이다.

사는 동안만 지킬 각오가 아니라 죽고 나서도 지킬 각오를 해야 할 때가 아니더냐고.

네 각오가 알량한 자기만족에서 끝나지 않으려면 힘껏 더 고민해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사실 나의 아내는 정말 강한 사람이라서 이렇게 긴 글로 구구절절 내가 당신을 지킬 각오를 했노라고 쓴 것을 보면 픽 웃어버릴 것 같다. 당신이 날? 그렇게 골골거리는 병약한 몸으로? 라며 내 각오를 퉁 튕겨버릴 것 같다.


아, 결국 이 글은 내 오만에서 흘러나온 결심같구나.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지만 해답은 없는 끄적임 같은 것.

기어코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고야 마는 인간의 변덕스러운 사색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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