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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홍 Feb 10. 2020

우리 이야기니 보기는 했던 영화들

한 퀴어 부부의 퀴어영화 감상기

(*최대한 배제했으나 여성퀴어영화 일부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솔직하게 글 시작 전 고백할 것이 있다.

우리 부부는 영화에 대한 고견을 보일만큼 영화를 잘 알거나 애정을 가지고 자주 감상하는 부류는 아니라는 것. 그냥 킬링타임용으로 "영화나 보러 갈까?"하고 한 편 골라 보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집 소파에 편하게 누워 넷플릭스나 왓챠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주전부리를 갖다 놓고 보는 걸 더 좋아하니 그럴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쓸 에세이는 그저 우리 부부의 아주 개인적인 감상기임을 미리 양해를 구해두고자 한다.

(쉽게 말해 영알못... 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퀴어라고 이성애 로맨스 영화에 무조건 감흥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니다. 

아내는 로맨스 영화를 꽤 좋아하고 내가 절대 안 볼 것 같은 한국 로맨스 영화도 꽤 많이 봤던 것으로 보였다. 같이 봤던 로맨스 영화 중엔 <노트북>, <어바웃 타임>, <클래식> 등이 있었는데 아내가 꽤 재미있게 봤던 것들이었다. 특히 <노트북>은 자주 다시 봤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나는 반대로 로맨스 영화는 취향에 맞는 것을 찾은 기억이 별로 없다. 장르영화에 로맨스가 좀 섞여있으면 모를까 로맨스 영화를 집중해서 끝까지 본 것은 손에 꼽는 것 같다. 보려고 시도도 잘 안 하지만 사랑을 주제로 하는 영화엔 늘 무딘 편.

그나마 끝까지 본 이야기는 <클로저> 정도가 떠오르는데 전형적인 이성애 로맨스 영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고. 한창 아주 인기가 많던 <이프온리>를 세 번 틀었다가 세 번 다 중간에 잠든 전적이 있다.


결국 우리 부부의 영화 취향은 스릴러, 반전, 약간의 고어나 약한 공포물 즈음으로 합의점을 찾았고 영화관까지 꼭 찾아가서 보게 만드는 것도 그런 영화들이 많았다. 

(가장 최근 영화관에서 봤다고 기억에 남는 영화는 <미드소마>이다.)


그럼에도 정말로 이상한 것은 우리가 여성 퀴어영화는 반드시 영화관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기다리면 스트리밍 사이트를 통해 볼 수 있을 테고, 그렇게 급한 마음도 아닌데 이상하게 여성 퀴어영화만은 영화관으로 달려가서 반드시 보고야 만다는 사실을 에세이를 쓰기 직전에 깨달았다.

의리 같은 것일까? 아니면 드디어 우리가 백 퍼센트 공감할 로맨스 영화가 나와주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부부는 아직까지 백 퍼센트 공감을 한 퀴어영화를 찾는 것은 실패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고 있는 상태이기는 하다. 우리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달려가 봐도 공감되거나 마음이 절절해져 한 번 더 보고 싶거나 그런 영화라고 할 만한 작품은 아직 못 만난 것이다.


영화관에서 본 여성 퀴어영화 중 가장 기대가 컸던 <아가씨>를 보고 나왔을 때 기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우리는 환하게 불이 켜진 영화관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아니, 왜?"하고 동시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이 영화를 기대하며 영화관으로 달려갔던 가장 큰 이유는 원작인 <핑거 스미스>를 우리가 둘 다 참 재미있게 봤던 기억때문이다. 이 스토리를 한국 배우들이 연기하다니, 21세기 짱이다,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영화관에 들어간 우리는 이어지는 전개에 당황한 서로를 공기로 느낄 수 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스토리라인 전개 속에서 심장을 내려앉게 만드는 반전이 한 3회 정도 있는데 그중 2회는 그냥 삭제되고 1회는 굉장히 기묘하게 등장인물 입으로 밝혀버리는 식이었다. 그리고 여러 디테일들이 원작보다 취향상 좀 아쉬웠다. '아가씨'라고 불리는 히데코는 원작의 모드보다 약했다. 모드가 약하지 않다는 것이 반전이었다면 영화는 여성들의 연대가 약하지 않다는 메시지 전달이 더 강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유의미한 영화임에 틀림이 없겠으나 스토리 전개가 흥미진진해야 즐거워하는 우리는 조금 아쉬움을 느끼며 영화관을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캐롤>.

얼마나 겨울을 뚝 떼어 영상으로 옮긴 것 같이 아름다운 영화였던지 겨울만 되면 캐롤의 OST가 듣고 싶어진다. 정말로 영화 속 영상미는 나를 푹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겨울 풍경을 보여주는 힐링 화면을 계속해서 보듯이 조금씩 지루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 전개가 어떻게 될 것인지 너무 뻔히 보여버렸던 것이다. 마치 앞부분 안 보고도 결말 예측이 가능한 막장 드라마처럼. 

"왜 꼭 누군가 다른 쪽을 놓고 떠나는 쪽으로 스토리가 흐를까?"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당연하게 퀴어 커플인 등장인물들은 현실 속 제약을 통해 고통을 받고 어느 한쪽이 포기하지만 나중에 다시 재회하거나 재회하지 않거나. 

우리가 겪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예쁜 화면 속에 옮긴 것만 같아서 이 역시 우리 취향의 영화는 아니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그러다가 내가 아주 오래 기대하며 개봉을 기다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사람이 몇 없는 작은 상영관에서 봤을 때 중간까지는 아주 흥미로웠다. 

이거 스토리 하나 나올 것 같아. 벌써 흥미진진해, 화가와 초상화를 그리지 못하게 하는 아가씨라니.

음, 그렇지만 또 불이 켜진 순간 아내가 "잉?"하고 자기도 모르게 말했고 나는 웃기 시작했다. 

아아, 안 되겠구나. 아직까진 우리가 픽할 수 있는 퀴어영화를 만나진 못했구나. 그런 생각에 한참 웃었다. 

이번에도 우리 인연은 여기 까지여요, 다음에 또 영화관에서 만나요. 좋은 퀴어영화여.


노파심에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우리 부부는 영화를 잘 모른다.


숨겨진 디테일, 어느 정도 잘 알고 보면 보이는 화면, 메타포, 각종 영화적 장치 같은 것들을 잘 모른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우리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시의 퀴어영화들을 폄하할 생각은 절대로 없다. 그런 건 절대로 아니다.


그저 우리와 맞지 않는 길을 달리는 사람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어어, 그 길로 가시려고요? 아, 이 길로 가주면 더 좋겠는데. 그럼 십 년 뒤에 또 생각이 나서 다시 켜보고 싶은 그런 영화로 우리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저 모든 영화들은 영상미와 감정선에 대한 묘사, 아름다운 음악이 정말 더할 나위 없었다.

다만 언젠가는 우리가 좋아하는 스토리 속에서 동성 연인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싶다. 흥미진진하고 이다음 스토리에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고, 그 연인을 위협하는 것이 그들이 동성이라는 그 팩트 하나가 아닌 다른 사유이기를 바란다. 

뭐, 범죄에 휘말린다거나 건물이 무너진다거나, 외계인이 침공한다거나 그런 것들?

외계인이 침공해서 도망치는데 서로 의견이 안 맞아서 엄청나게 싸우다 길이 갈라지고 서로를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성의 연인이 나온다면 흥미진진하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고 나오면서 "잘 봤다."하고 기지개 켜며 산뜻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정말로 우리의 취향일 뿐이다.

스릴러에도 좀비물에도 범죄사기극이나 각종 팩션에서도 동성의 연인이 그저 인물로서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그 전개를 따라 같이 달려주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취향. 


물론 우리 부부는 앞으로도 여성 퀴어영화가 나오면 무조건 영화관으로 달려갈 것이다.

어떤 의리로다가. 일단 우리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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