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라도 말하면 내 속이 나아질 것 같아서
항상 그랬듯, 사귀던 남자친구와 많은 대화가 오가던 중, 어떤 사람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지났을까. 그 사람이 계단에서 굴러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남자친구와 나, 둘 다 이 상황이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20대 초반에 알게 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친구 두 명과 여자친구, 이렇게 넷이 제주도 여행을 갔었다. 그리고 그대로 먼 길을 떠나버렸다. 나는 그때 살면서 처음으로 장례식장에 가봤다. 그날, 그 친구의 누나는 슬픈 내색 없이 조문 오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상냥하게 음식만 나르고 있었다. 약해 보이기 싫어서라기보다는 이성적이고 예의가 몸에 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난 그 모습이 어째서인지 더 슬퍼 보였다. 집에 가서는, 저 사람은 동생을 생각하며 얼마나 무너질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겐 어떤 동정도 기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제일 좋다는 것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그런 감정들을 느꼈을 것 같다.
장례식장에는 전에 말한 예쁜 친구와 함께 갔고, 나는 앞에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 그 친구가 떠나기 전 함께 자주 보던, 같이 여행을 갔던 친구에게서 사고 당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적한 도로였고, 앞서 가는 두 명의 친구들이 속도를 내서 달리자 그 차를 따라가려고 속도를 많이 낸 상태에서 옆 차선에서 차가 오니 당황한 나머지 핸들을 꺾었고, 그게 하필 오는 차 쪽 방향이었다고 했다. 운전 미숙과 당황스러움이 겹친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 친구와 여자친구는 너무도 찬란한 나이에 함께 우리 곁을 떠났다.
그 친구는 미대생이었다. 아직 내 삶에 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떠나, 문득 생각이 났고 복잡함이 사라지고 차분해진 요즘, 더욱 그립다.
그 이후로 장례식장에서 당시 상황을 이야기해 준 친구와도 한참을 연락하지 않았다. 어느 날 연락이 닿아 만났는데 내가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 친구가 짧은 시간에 분위기가 너무도 많이 변해있었기에, 난 내가 약속 시간을 어겨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닌 거 같더라. 내가 울면서 말했다. 너, 그 친구 일 이후로 너무 달라진 것 같다고. 혹시 죄책감 때문에 이렇게 변한 거냐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는 자신의 미성숙함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자책감으로 어린 나이에 겉으로라도 성숙한 척하려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울면서 얘기하니, 태도를 바꿔 예전처럼 대해주던 그 친구가 생각난다. 하지만 그 이후 난 연락을 하지 않았고 그 친구도 하지 않았다. 내 시선에서 본 그 친구의 모습이었기에, 그때 그 변화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번쯤은 다시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 당시 또 알고 지내던 사람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암이 발병해 투병을 하다가 나은 줄 알았는데, 다시 재발해서 결국 세상을 떠났다. 나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20대 중후반, 너무도 젊은 나이였다. 그 사람은 전혀 모를 테지만 조금 다가가기 어려운 스타일이라, 마음이 있었어도 한 번 본 이후로는 내가 괜히 작아지는 것 같아 연락을 못 했다. 모델 일도 하고, 연예계 쪽으로 발돋움하고 있던 앞길이 창창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이걸 쓰다 문득 든 생각인데, 첫 일화 빼고는 내가 이른 나이에 한 결혼 전 모두 겪은 일들이었다. 그때는 시간이 그렇게 빠르게 흐르지 않았는데, 지금은 너무도 빠르다는 걸 느낀다.
전 남편을 처음 보시고는 “사람이 참 반듯하게 잘생겼다” 하시며 눈을 떼지 못하시던 큰엄마 말이다. 사실 가족관계가 아닌 우리 세 자매를 돌봐주시던 분이었다. 언니를 키워주시다가 동생까지 돌봐주셨다. 자연스럽게 그분을 큰엄마라고 부르게 됐다. 내가 그분 손에 자란 기억이 없는 건 나는 숙모가 돌봐주셨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큰엄마도 암 투병을 겪으시다가 많이 아파하시다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신실한 기독교인 이셨고, 여의도에 있는 큰 교회를 매주 다니셨다. 나도 따라간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부산에 있어서 장례식에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그냥 오지 말라고 하셨다.
오는 사람도 없고, 작게 치를 거라고.
마지막까지 언니 이름을 부르셨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전 휠체어에 앉아 계신 사진을 봤는데, 항상 염색을 하시고 정갈하게 다니시던 분이 백발이 되어 많이 야위어 계셨다. 그 사진을 저장해두고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평소처럼 게임을 하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그리고 펑펑 울었다.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더 울었다.
이후 전 남편과 동생과 함께 산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큰엄마에게 우리 부모님보다 나이가 많으신 자녀 분들이 계셨다. 그분들이 마중 나와주셨고, 그때서야 큰엄마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자녀 분들이 우리 부모님보다 훨씬 많아 보이신다는 건, 큰엄마가 아주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으셨다는 뜻이었다.
큰엄마는 어린 나이에 데릴사위와 혼인하셨고, 자식도 있었지만 그대로 집을 나오신 것 같다. 나는 데릴사위라는 말을 억지로 한 혼인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알고 보니 사위가 처가에 헌신하는 걸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만큼 너무 이른 나이에 시작된 삶이었기에, 아무리 남편이 헌신하며 사랑해 주었더라도 본인의 삶에 온전히 만족하기는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 잠시 삶의 업적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동생이 유치원을 다니고 내가 초등학생일 때 큰엄마와 짜장면을 먹은 기억이 있다. 그때는 드셨다. 조금 더 커서 다시 짜장면을 먹으러 갔을 때, 큰엄마가 드시지 않으셨다. 이걸 다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짜장면을 먹다가, "짜장면 먹다가 물이 많이 생기는 이유가 침이 들어가서래"라고 말한 걸 기억해서 그렇다.
큰엄마가 돌아가신 뒤 꿈에도 자주 나오셨다. 웃고 계실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잠시나마 그분을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다. 큰엄마가 그때 짜장면을 안 드신 이유는 아마 돈 때문이었을 것 같다.
우리 부모님이 이혼한 이후 큰엄마는 우리를 정으로 봐주셨다. 수입이 사라진 뒤에도 지원되는 돈으로 생활하신 것 같다.
집은 단칸방이었지만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리해 두고 지내셨다. 나도 요즘 그렇게 하고 살려고 노력한다. 비록 부유하진 않더라도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조금만 더 계시다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한다. 돈 때문이란 생각을 하면 지긋지긋하다가도, 앞으로 잘 살아서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풀다 여한 없이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큰엄마가 음식을 정말 잘하셨는데, 콩나물이 들어간 된장찌개가 유난히 그리워지는 저녁이다.
큰엄마의 따님의 번호를 알고 있다. 최근에 의미 없이 스크롤을 내리다가 그분의 상태메시지에 '결국 티끌인 것을'이라는 글귀를 봤다. 티끌이 자신인지, 우리인지, 부모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너무 많은 의미로 다가왔다. 연락을 하면 좋아하실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자식 곁에 계시니 많이 외롭지는 않으실 거라 생각한다. 큰엄마는 자식을 놓으셨지만, 자식은 부모를 놓지 못했다. 그러나 큰엄마는 아이들을 좋아하셨다. 쉽게 돌아가지도, 돌아갈 수도 없는 현실에서 우리를 봐주신 거고, 평생을 아프다 가신 것 같아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다.
그리움이라는 놓지 못하는 감정이 살면서 제일 큰 아픔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아픔을 겪게 되는 것도 본인의 몫이고, 나의 업적, 나의 후회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외할머니댁에 자주 가지 않았었다. 한 번씩 가면 외할아버지는 항상 거실 한편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계셨다. 가족들이 거실을 지나가도 할아버지는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고, 미동도 없으셨다. 내가 없을 때는 친척들과 대화를 하셨는지 난 잘 모른다. 물어보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떠나셨다는 전화를 받고 엄마는 “지난주에 내려갔어야 했는데”라며 주저앉아 울었다. 내려가려던 참에 그런 전화를 받은 거였다. 나에게는 ‘엄마’, 엄마에게는 ‘아빠’. 그 감정이 완전히 와닿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니 나도 슬프다. 이런 느낌이었다. 그냥 "엄마.."라는 말 외에 더 이상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웃음 짓고 말을 하셨을 때와 약간 쉰듯한 목소리도 기억은 나는데, 그건 너무 오래전 이야기였고 나는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지 않았다.
요즘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퍼즐이 맞춰졌다. 할아버지가 항상 이불을 펴놓고 앉아 계셨던 곳은, 일곱 남매 중 군대에서 훈련을 받다 머리를 다쳐 장애 판정을 받고, 이후 젊은 나이에 먼 길을 떠난 막내 삼촌이 계셨던 곳이었다. 나도 신기하다. 삶을 뜯어볼수록 더 드라마 같고, 한 편의 영화 같은 상황들 속에서 인생이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붙잡는다. 한편으로는 나에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난 건가 싶다가도, 다른 사람들의 상황을 떠올리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삶 자체가 교훈을 주는 건 좋지만, 아프다는 게 문제다. 아픔이 곧 교훈이겠지만.
정말 먹먹했던 건 5년을 사귄 남자친구와의 대화 중,“그 시절이었으면 훈련을 받다 다치신 게 아닐 수도 있었겠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나는 삼촌을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삼촌과 삼촌의 여자친구는 첫째 언니를 많이 아꼈고, 우리에게도 늘 다정했다고 들었다. 장애 판정을 받은 뒤에도 삼촌은 우리를 보면 웃으셨지만, 말은 제대로 하지 못 하셨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국가를 위해 몸 바쳐 일하다 장애를 얻은 것이니 표창장을 내려준 것 같았다. 감사한 마음도 들었겠지만, 부모님에게는 허탈함이 더 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세대에는 ‘상남자’가 많은 환경이었다고 전에 쓴 적이 있다. 내가 말하는 상남자는 겉으로는 강한 척할 수 있어도, 마음은 여린 사람을 말한다. 그 시절의 분위기와 기준이, 누군가에게는 감정을 숨기고 버텨야만 하는 방향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안에서 누군가를 악마처럼 상상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역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환경과 구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마음을 찌른다.
확실하지 않고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 이야기를 더 힘들게 만든다. 다만 혹시 할아버지도 삼촌과 같은 남자였기에, 짐작하는 게 있지 않으셨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아픔을 곱씹으며, 그 아픔을 다른 가족들에게 전파하지 않으신 채 혼자서만 견디고 계셨던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말 그대로, 나도 마음이 찢어질 것 같다.
할아버지는 주무시다가 가족의 곁을 떠나셨다. 일찍이서부터 술과 담배를 끊으신 분이셨다. 삶의 낙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자식들 보는 낙이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가 이혼하겠다고 할아버지께 말씀드렸을 때, 할아버지는 그냥 살라고, 가라고 하셨다 한다. 엄마는 그 이후에 그래, 다시 잘 살아보자 하고 셋째 동생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이혼하겠다고 엄마에게 말했을 때, 엄마는 자신의 삶에도 여유가 없다며 “마음대로 해”라고 답했다. 할아버지에게 엄마가, 엄마에게 내가, 각자 소중한 자식이었지만 대처하는 방식은 달랐다. ‘상황과 환경’, 그리고 ‘성향’이 이 장면에서도 그대로 존재했다. 아이러니한 생각이 들 때면 이런 기억들을 한 번 더 돌이켜보게 된다.
전 남편의 외할아버지도 70대의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모아둔 돈은 별로 없었어도, 편하게 살다가 주무시다 가셔서 다행이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염’을 보았다. 손자며느리가 손잡아드려라, 하셔서 손도 잡아드렸다. 그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없었지만, 죽음 앞에서는 그저 눈물만 흐르더라.
사람은 모두 언젠가 떠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나는 너무 이른 나이에 그 사실을 배웠다. 누군가는 나보다 더 이른 나이에 겪었을 수도 있고, 거기서 오는 깨달음이 또 있을 것이다. 어리다고 해서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임팩트 있는 상황은 모두 기억에 남는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나도, 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것처럼. 이제야 그때의 의미들과 깨달음들이 조금씩 정리되고 있다. 더 알아가야 할 것들이 많지만 깊게 파고들지는 않으려 한다. 더 파고들어도 힘이 드는 아픔들은 아니다. 그저 삶이 주는 조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조금 벅찰 뿐이다. 현실을 살아가기엔 자꾸만 눈물이 흐르는 게 도움이 되진 않으니까.
나는 아직 누군가를 떠나보낼 준비가 충분히 된 사람은 아니다. 내가 죽는다는 생각, 혹은 소중한 인연들이 세상을 떠난다는 생각만 해도 눈물부터 흐른다. 현실이 아닌 스쳐가는 감정일 뿐이지만, 그 감정은 내 마음에 온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하늘이 무심하게도 떠나간 사람들이 있다.
세월을 충분히 겪고 떠난 사람도, 그러지 못한 사람도 있다.
아직도 가끔, “잘 살고 있지?”라는 말을 건네고 싶은 얼굴들이 있다.
볼 수 있다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