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말, 가을이 빠르게 물들고 있다. 달빛에 기대어 어설프게 걸었던 갯골길의 기억이 있다. 기억은 그릇에 담긴 물 같다, 처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이렇게 말하면 기억에 대해 불신이 있다는 말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사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의심(疑心)이다.
마음과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잡념은 내려놓고 배낭이 주는 적당한 물리적인 무게를 등으로 느끼며 걷기 시작한다. 늠내길 ‘갯골길’과 ‘숲길’은 시청이 출발점인 동시에 도착점이다. 시청 정문을 나와 좌회전하여 곧바로 장현천변 길로 접어들면, 어느새 달라진 주변이 시야 한가득 다가온다. 논과 밭이 이어져 있고 둑길에 심은 콩이며 작은 들꽃이 풀들과 어우러져 흔들리고 있다. 시흥시가 생산하는 쌀 ‘햇토미’를 연구하는 쌀 연구회는 멀리서 보면 볼품없지만, 농기계가 들어서 있는 넓은 앞마당은 정겨운 향수를 느끼게 한다. 논두렁과 농로는 자연 길에 가까워 걷다 보면 심신이 안정되고 여유로워진다. 더하여 시골에서 살았던 어릴 적 기억이 있다면 벼와 흙, 풀 냄새로 남다른 감상에 젖어들게 된다. 이럴 땐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도 너그럽고 긍정적이며 그리움을 담게 된다.
갯골 오아시스 쉼터에 이르면 갯골과 이어진 그린웨이, 자전거도로와 만나게 되고 곧이어 갯골생태공원으로 들어서게 된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시흥의 대표 얼굴인 갯고랑이 보인다. 시흥갯골생태공원은 내만갯골 자연생태자원과 옛 염전의 문화유산을 활용한 조성으로 2012년 국가 해양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좁다란 길 양쪽에 심은 벚나무가 햇볕을 가려준다. 벚나무 길을 지나면 잘게 부서진 자갈 밟는 소리가 동무처럼 따라오는 길 시작이다. 왼쪽으로 염전체험장이 운영되고 있다. 이곳 물은 지하 120미터 암반을 뚫은 지하수를 사용하게 되므로 방사능오염 걱정이 없다는 설명이다.
바닷물이 들고나는 갯골 주변을 더 가까이 관찰할 수 있도록 갯골 주변 구간마다 나무재질의 데크 로드가 설치되어 있다. 염분기와 강한 햇빛으로 인해 금방 상하긴 하지만 무성한 갈대들과 어울려 아늑한 공간을 느끼게 한다. 또한 구간마다 물길을 조절하는 제방과 수문을 만나게 된다.
‘떠내려 온 산’이라고 전해오는 섬산을 보기 위한 U자 형의 아까시길과 갈대숲 길은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 외면하기 쉽다. 한 사람만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을 걷다 보면 여럿이 왔어도 혼자만의 호젓한 감상을 즐기는 소중한 경험이 된다. 섬산은 볼거리가 부족하지만 앞으로 생태공원과 함께 생태수목원으로 복원하여 가족 피크닉을 위한 장소로 꾸며질 예정이다.
다시 짜그락짜그락 발아래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방산대교 저편으로 즐비한 아파트 숲이 눈에 들어온다. 이쯤이면 쉬고 싶고 시장기도 돈다. 넉넉한 그늘은 없지만 적당히 자리 잡고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는다. 김밥이나 주먹밥으로도 풍성하게 잘 차린 음식이 된다. 바람 한 자락, 하늘의 구름을 반찬 삼아 곁들인다.
맞은편 갯골로 가기 위해 방산대교를 건너서 방산오수중계펌프장도 지난다. 지금은 이후 만들어진 자전거다리를 이용해 넘어간다. 오른쪽으로 펼쳐진 갯벌은 이제까지와 또 다른 깊이를 보여준다. 햇빛에 빛나는 갯벌이 단단한 근육질 피부처럼 건강해 보인다. 물이 빠져 바닥을 드러낸 갯고랑 경사는 다소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이곳에 이르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아직 염전업의 흔적이 남아있는, 염전의 소금과 뱃일에 기대어 흥성하게 한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왼편 멀리로 소금꽃과 염생식물을 키우며 한가로운 오수를 즐기는 옛 염전 터가 보이고 방산동과 포동 마을까지 이어진다. 염전바닥으로 내려가 마을로 걸어갈 수도 있다.
10.4km 지점의 포동빗물펌프장에 이르면 포동 새우개마을이 길 하나 저편에 있다. 다시 오른쪽을 보면 키를 넘는 갈대밭 속에 생태문화탐방로가 꼬리를 물고 있다. 길가에 무리 지어 핀 코스모스도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든다. 미로 같은 갈대밭 길을 지나 갯골생태공원 부흥교 앞에 서면 구수한 벼 냄새가 난다. 배수갑문을 향해 걷는 길옆 펼쳐진 논 저편에 KBS송신소 송전탑이 보이고, 드문드문 서 있는 아파트가 배경으로 잡힌다. 미산동 살미 동네는 몇 걸음만 걸으면 호조벌 넓은 들판이 바로 앞마당이다.
주변으로 드물지만 낚시꾼을 볼 수 있는데 배수갑문 위에도 여러 명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시흥에는 낚시 즐기기 좋은 곳이 많다. 갯골의 수로와 시화방조제에서도 낚시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낚시는 기다림의 미덕을 배우는 일이기에 여유롭게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즐기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여가문화가 예전과 많이 달라진 모습은 낚시터에서도 알 수 있다. 다수의 낚시꾼이 물고기 아가미가 다치지 않도록 민바늘을 쓴다. 조과(釣果)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으로 하나의 대를 드리우고 있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대를 사용하면 잦은 미끼교체로 수질오염 가능성이 높고 휴식 아닌 노동이 되기 쉽다.
원통의 나선형으로 우뚝 선 흔들전망대는 갯골생태공원의 이정표라 할 수 있다. 높이 22m, 6층 목조로 계단 없이 오른다. 3층부터 바람에 따라 흔들림이 감지되고 전망대에 서면 150만 평 갯골생태공원을 휘저으며 부딪쳐오는 바람의 실체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제 갯골오아시스 쉼터를 지나 시골 간이역 같은 군자갑문 다리를 지나 장현천 따라 제2경인고속도로 아래 짧은 굴다리까지 지나면 쌀 연구회 건물이 고지가 멀지 않음을 말해준다. 아름다운 농로를 타박타박 숨 고르기로 걸어 시청정문을 밟으면, 16km 갯골길 걷기가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