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골길과 이웃한 마을이야기 2

by 연이은
미산동_솔숲공원.jpg


포동(浦洞) 새우개 당제

얼마 전 포동 새우개 마을회관을 찾았다. 동네 사랑방 분위기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포동새우개마을 도당제 워크숍’ 현수막이 윗목에 붙어 있다. 하지만 방안 풍경은 ‘워크숍’이 주는 문구와는 거리가 멀다. 현수막 아래 상을 여러 개 놓아 발제자 자리를 만들었고 나머지 디귿자 벽으로 동네 노인들과 관계자 여럿이 둘러앉았다. 할머니가 데려온 어린 손자는 사람이 많아 신이 나는지 앞에서 연신 재롱을 부린다. 주고받는 얘기에 아랑곳없이 방 안으로 들어온 파리를 잡느라 여념이 없는 어르신과 이른 가을, 손님을 맞으며 방에 불을 지핀 마음이 맞닿아 정겨웠다.

지역의 한 사회단체가 희망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진행한 이 자리는 한때 어업의 발달로 흥성했던 새우개마을을 오늘의 시점에서 조명하고자 마련했다. 이름에서 짐작되듯이 포동의 중심 마을 새우개는 1960년대까지 배가 드나들었던 포구였다. 당시 어업활동은 주로 조기잡이였는데 한창일 때는 황해도 연평도까지 조업을 나갔다고 한다. 포동새우개 일대가 조기잡이 어업과 염업으로 풍요했던 경제사정은, 소래면장을 하느니 포리이장을 하겠다는 말이 나돌았던 점으로도 짐작가능하다.

오래전부터 마을 중앙의 당집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과 7월 초 날을 정해 주민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당제를 지냈으며, 서편마을과 동편마을을 지키는 장승 앞에서 장승놀이를 했다. 마을의 규모가 한창 커지며 번성하던 시절, 도당제는 주민공동체와 함께 숨 쉬는 놀이와 축제의 장이었다. 며칠에 걸쳐 치러지는 마을의 커다란 잔치였던 당제와 장승놀이를 기억하는 주민 수는 세월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 있다. 도당제는 어업과 염업의 쇠퇴, 그리고 생활양식 변화로 점차 위축되었다. 유교적 제례와 무속 굿이 섞여 있어 학자들의 주목을 받던 새우개 도당제는 2006년까지 이어지다가 중단되었다. 그동안 뜻있는 원주민들은 새우개도당제를 되살려보고자 꾸준히 노력하였다. 마을을 떠난 사람이나 인근의 공장들에게 당제 치르는 비용을 추렴할 때 대부분이 선뜻 동참하였다는 통장의 설명이다. 전 통장, 현 통장, 부녀회장, 시청 담당자와 주민 등이 모여 나눈 간담회는 시대의 변화를 읽으며 현실에 맞게 마을축제 형식의 도당제를 고민해 보자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지난 8월에는 시흥시청 늠내홀에서 ‘새우개마을 민속극’ 공연이 있었다. 서도소리보존회시흥지부가 주최한 공연의 일부에 새우개 노인회원이 출연하게 되어 연습하는 자리가 있었다. 노인정에서 무대 위의 동작을 배우며 쏟아내던 함박웃음이 떠올라 지금도 미소가 번진다. 배치기 노래가사 중, ‘연평바다 널린 조기 / 양주만 남기고 다 잡아들여라’하는 구절이 있다. ‘양주’는 바깥주인과 안주인을 말하는, 즉 부부를 이르는 말로 생명의 원천인 어미를 보호하는 뜻으로 눈앞의 이익만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던 조상의 지혜가 담겨있다.


신촌과 염전

포동의 신촌마을은 1900년대 초 일제 강점기 때 소래염전을 축조하고 노동자의 사택을 만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오랜 역사와 다양한 민속문화가 전승되어 온 자연마을 새우개와는 100m 남짓 떨어져 있어 생활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을 형성 시기가 오래지 않아 3세대 정도 내려오고 있으며 전통마을과 같은 집성의 분포도 없다. 주민의 생업환경은 농사주기와 다른 한 달을 기준으로 하는 생활과 휴일주기 등으로 농업과 다른 환경을 만들어나가게 된다.

염전 일은 1년 중 봄부터 장마가 오기 전인 4월~6월이 제일 바빴다. 일조량이 많고 가물어서 소금을 많이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한가한 겨울에는 땔감을 구하러 산에 오르거나 바다를 막는 일에 나갔다. 주요 생업기반이었던 염전이 사라지면서 마을 주민들은 가내 부업과 마을에 들어선 공장에서 임노동을 주로 하고 있다. 소래염전은 1996년 폐렴 되기까지 60년 동안 방산동의 고잔, 포동의 신촌과 새우개, 미산동 일부 자연마을 주민의 생업이었다. 수로가 있어 어업으로 번성하였고 염전과 농사를 병행하던 새우개나 고잔과 달리 신촌은 농토 없이 염전 일을 주로 하였기에 쌀과 채소를 사 먹었다고 한다.


미산동(米山洞) - ‘쌀뫼’에서 ‘살미’로

시흥대로변 시민교회 앞에서 들어가는 길은 여전히 S자 고갯길(당넘어고개)로 비탈진 배 밭과 군데군데 여러 기의 무덤이 엎드려 있다. 얼마 전까지도 한 대의 버스가 드물게 왕래하였고 종점인 탓에 시간을 다투며 움직이는 사람이 생활하기에는 자가용 없이 다소 불편한 동네였다.

한때 미산동도 인근지역처럼 개발될 기회가 있었으나 토지를 소유한 주민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택지개발사업은 공영개발과 구획정리 두 가지가 있다. 공영개발은 지자체(정부)에서 개발할 땅을 모두 사들여 진행하는 것으로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이다. 구획정리사업은, 모든 개발의 시초가 길 닦는 일(도로)이니만큼 개인이 소유한 토지의 55%만 보존받고 나머지를 도로로 내놓아야 한다. 당시 인근지역의 개발사업이 지지부진하여 관에서 구획정리를 추진하였으나 토지소유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얼마 전 동네 자동차정비센터에 모여 앉은 주민 몇이 그때의 얘기를 나누며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쌀 ‘미(米)’자에 뫼 ‘산(山)’자를 쓰는 미산동을 노인들은 보통 살미 동네라고 부른다. 법정동의 미산동은 시흥대로에서 보면, 살미라 부르는 창동, 월촌, 옛터골(고기동) 마을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으로 구시미, 간댐, 양우재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 외 소소한 옛 지명들은 아파트와 연립이 들어서고 공장들이 난립되어 있어 유래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기 어렵다. 버스정류장이나 학교 이름, 상호 등을 눈여겨보면 그렇게 사라져 가는 자연마을이나 옛 지명의 흔적을 찾을 수 있기도 하다. 양우재 정류장, 월촌공인중개사 정도가 생각난다.

한덕판지 정류장을 중심으로 미산동을 살펴볼 때, 1994년 미산동으로 이전한 한덕판지공업(주)뒷산을 ‘상아재봉’이라 한다. 이 산의 정상은 풍수로 보아 수리형국이며, 상봉 아래 봉은 매형국, 옛터골 서남쪽 아래는 금계포란형이다. 주변에 여러 기의 무덤이 있다. ‘상아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현재 KBS송신소가 있는 위치를 ‘뒷말뿌리’라 하는데, 철망 펜스에 둘러싸인 키 큰 송전탑이 논 안으로 발을 내리고 서 있다. 창동, 월촌, 옛터골의 미산동은 조선시대 바다를 막아 농토로 만든 ‘호조벌’과 연이어 있으며 양우재, 간댐, 구수미 쪽은 포동(浦洞), 방산동(芳山洞) 일부와 맞닿아 있다.

미산동은 조선시대 창동․고기동(옛터골), 이리(구시미, 간댐, 양우재)를 1914년 합하면서 미산리로 이름 붙였다가 시흥시 승격과 함께 변경되었다. 미산 1리와 미산 2리로 불리던 시절로 구분하면 시흥대로를 사이에 두고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뉜다. 같은 미산동이어도 한쪽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주거환경이 계속 변화하는데, 다른 한쪽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외형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포동, 방산동과 연하여 있는 옛 미산 2리(양우재, 간댐, 구수미)가 지금까지 여전히 그린벨트지역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간댐은 양우재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양우재와 구시미 사이에 있다 하여 ‘간댐’으로 불린다. 예전에는 이런저런 연유로 동이점, 중암리, 중암동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 지역도 그린벨트로 인해 지붕모양만 바뀌었을 뿐 주택구조는 1970년대 그대로이다. 구수미(九水美․九秀美․九水尾) 마을은 간댐 서쪽에 위치해 방산동 ‘다니’와 남쪽으로는 포동 ‘걸뚝’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여러 지명으로 자료에 나타나 있으나 ‘구시미’로 소리 내고 있다. 조선시대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이곳이 물가여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양우재는 부천-안산 간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미산동 하면 떠오르는 지명일지 모르겠다. 시흥대로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놓인 마을로 뒤에 있는 산 생김이 어미 소의 형국이라 소를 기르면 잘된다 하여 양우재(養牛峴)라 부르게 되었다. 큰 도로변에 위치한 마을이라 교통은 편리하나 마을 전체가 그린벨트여서 농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미산동 솔숲공원

2006년이 저물어 가도록 부국아파트 앞길은 비포장이었다. 같은 미산동에 살아도 이쪽 방향은 처음 와 보았다. 도로를 내느라 파헤쳐진 상태로 내린 눈이 녹아 진흙탕이었던 당시 기억이 생생하다. 뒷산을 조금 깎고 앞의 낡은 집들을 대충 정리하더니 해가든아파트 몇 동이 들어섰다. 여전히 버스는 한 번호만이 오가고 초등학교는 들어서지 않았다. 고즈넉한 시골분위기를 내세울 수도 있으나 관심에서 밀려난 외로움 같은 것이 늘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쓰레기와 잡풀이 섞여 무성하고 조금의 불빛도 없이 으슥하기만 하던 등 뒤 언덕이 기지개 켜듯 일어나 몸단장을 시작했다. 반원 모양의 벤치가 차도 쪽을 향해 놓이고 부드러운 나무 바닥과 계단이 깔리면서 아늑한 터널모양의 진입로도 알맞은 경사로 놓였다. 궁금한 마음에 올라가 보면 기다리란 듯이 높은 가림막을 두른 채 공사장 안쪽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모습을 드러낸 솔숲공원은 단비처럼 주위를 산뜻하게 만들며 등장하였다. 마땅한 휴식 공간 하나 없이 허술했던 마을 입장에서 솔숲 공원은 반갑고 귀한 손님이다. 공원 안은 가로쌈지쉼터, 산책로, 야외무대, 바닥분수, 물놀이장, 운동기구, 소나무쉼터, 농구장 등이 야산의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살리며 들어앉았다. 여름 한낮, 높게 매단 두레박과 우산(버섯) 모형에서 물이 쏟아진다. 그 아래 물놀이하는 아이들과 그 모습을 바라보는 어른들 모두 행복한 얼굴이다. 부자가 된 기분이랄까. 효과적으로 활용되는 공동의 공간, 아담한 공원 하나가 주위를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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