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지난해 초부터 모임 하나가 늘었다. 대여섯 명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난다. 이 모임이 가고자 하는 방향은 성서 읽기이다. 핑계가 많은 데다 길이 멀게 느껴지면 가볍게 나서기 어렵다. 읽어야 하는 책이 성서일 뿐 일반 독서모임과 다를 바 없다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가까이 가려 하는 이면으로 어떤 망설임이 서성대는지 궁금하지만 굳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성경’이라는 사실은 알려진 얘기이다. 잘 팔리는 것에 비해 독서비율이 낮다는 지적도 한편 있다.
믿음으로 따르는 종교와 상관없이 한 인간으로서 신구약성서를 한 번쯤 완독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교리 중요 부분의 견해차이가 있으나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모두 유일신을 믿는 종교이다. 그리고 세 종교 다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삼고 있다. 신을 부르는 언어가 나라말에 따라 다르고, 안식일이 시대 흐름과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바뀌었을 뿐, 뿌리가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가 아닌 믿음에 관한 얘기이다. 세상 다양한 종교가 유한한 인간의 생명을 위로하고 영원을 지향하며 행복한 삶을 바라는 궁극의 기원만큼은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계단에 앉아 울며 통화하는 앳된 다문화여성을 보았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고 싶었으나 그 나라 말을 몰라서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머뭇거리다가 포기하고 지나치면서 태초에 하나였으나 온 세상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불통으로 흩어지게 되었다는 구약 창세기의 바벨탑이 떠올랐다. 구약성경의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라는 구절을 대했을 때 충격이었다. 내가 옳다는 주장에 사로잡히면 나를 바꾸는 생각자체를 할 수 없다. 대부분 상대방이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하게 된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만족감이 크다. 그동안 여러 번 시도했었다. 매번 창세기에서 출애굽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가톨릭 미사전례 3년이면 신구약성서를 마칠 수 있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일반신자가 매일미사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3년간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평생 주일미사를 다녀도 온전하게 성서 한 권을 읽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가톨릭에서 진행하는 성서 읽기 모임이 ‘성서백주간’이다. 대략 121주, 3년여에 걸쳐 구약과 신약을 모두 마치도록 구성되어 있다. 성서백주간은 일본에서 45년 동안 선교사로 일한 마르셀 르 도르 신부가 창시하였고 우리나라에는 1992년 3월 세종로본당에서 처음 시작하였다. 방법은 ‘도움서’ 안내에 따라 일정한 분량을 읽은 후 일주일마다 모임을 갖고 나눔을 하는 순으로 진행한다.
시작이 반이라고 어느새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시들하지 않도록 의무감 내지는 사명감을 부여하지 않으면 계속 이어가기 쉽지 않다. 인과관계가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전개되는 한 호흡의 스토리가 아니어서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단순한 수치 나열이나 지루하게 반복되는 설명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게 보인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이 불친절하여 건조해지는 구간도 있다. 그런 반면, 지루한 고비를 묵묵히 넘다 보면 참을성에 보답하듯 툭툭 등을 치는 신선함이 있다. 살면서 부딪치고 멈춰 섰던 순간마다 굳어진 틀을 보게 했고 그런 고정관념이 주장하는 부끄러운 허위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고전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작품에 영감이 되는 창작의 교본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동족에게 이자를 받고 꾸어주어서는 안 된다. 돈에 대한 이자든 곡식에 대한 이자든, 그 밖에 이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 이자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금전이든 물건이든 빌리거나 혹은 빌려주었을 때 이자나 그에 상응하는 일정한 대가를 마땅한 것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맞게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자신을 향해서는 스스로 빚진 기분이 남았고, 반대의 경우이면 상대를 비양심적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접하고 인식을 수정하였다. 이자는 직접 일하지 않고 얻는 소득으로 즉 불로소득이다. 어느 시점부터 이런 불로소득이 당연시되었다. 그래서 빌려준 만큼을 돌려받았는데도 왠지 심리적으로 손해 본 것 같은 계산을 하게 되었다.
‘싸우러 나갔던 사람의 몫이나 뒤에 남아 물건을 지킨 사람의 몫이나 다 똑같아야 하오. 똑같이 나눠 가져야 하오’ 다윗의 말이다. 누구나 똑같이 받아야 한다, 분배에 대한 이야기로 본다. 여기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나름의 확고한 주장을 갖고 있었다. 많이 일한 사람과 적게 일한 사람이 있다면 나누는 몫도 그에 따라 다른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도 수정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판단하는 일이나 나누는 몫을 정하는 것에 대한 자격(권한)이 나에게 있지 않다. 애초에 무엇도 내 것이 아니다. 정의와 공정이 빈 메아리로 들리는 시대이다. 성서 곳곳에 ‘공정을 줄자로, 정의를 저울로 삼으리라’고 밝히고 있다.
얼마 전 주방용 저울 하나를 샀다. 크게 쓰임새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소소하게 나누거나 비율을 가늠할 때 대강 짐작으로 하기가 마땅치 않아서다. 무엇을 결정하는 앞에 서면 늘 뒷걸음이었다. 망설이다가 놓쳐버리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날이 저문다. 중심을 잡고 가려하는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기준과 잣대를 세워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