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노이아

말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by 연이은
울타리.jpg


부정부패 관련 청탁을 반대하는 구호로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는 캠페인이 있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여전히 쓰일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내 처신에 대한 변명이나 방어용으로 종종 사용한다. 대인관계에 서툴러 친밀감을 쌓기가 어렵고, 사회관계망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태도를 이와 같은 생활신조로 인한 것인 양 포장해 왔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함,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회색의 희끄무레함,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함을 마치 근사한 중용인 것처럼 착각하였던 일면도 인정해야겠다. 신앙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다. 두렵고도 외로운 세상살이에서 더 없는 위안과 평화를 주는 영역임을 믿고 있다. 좋은 것을 경험하면 그 좋은 것을 남에게 자랑하거나 권하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발로이다. 기쁜 모습을 보이며 간곡하게 다른 이에게 전하지 못한다면 나는 여전히 경계에서 서성이고만 있을 뿐, 이도저도 아닌 것이다.

지난여름을 보내면서 선교 관련 책 한 권을 읽었다. 물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너무나 먼 나라 얘기였다. 사이사이 책장을 덮고 그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숨 고르기를 해야 했다. 안다고 생각했던 여러 잘못알음이 보여 부끄러웠다. ‘메타노이아’란 마음을 바꾼다는 뜻의 그리스어이다. 회개의 의미가 있지만 ‘영적변화’라는 해석에 손을 얹고 싶다. 생기 있는 문장과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귀하고 맑다.

이 책의 이야기는 아프리카 마사이 부족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재발견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 가톨릭 신부가 1955년부터 약 20여 년간 아프리카에서 선교자로 활동하면서 기록한 체험과 성찰은 놀랍고 신비로웠다. 마사이 마을에서의 일을 그는 여행에 비유하였다. 먼저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교와 이교(異敎)를 결합시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결과를 모르는 채 무엇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자고 권하였다. 이 여행은 ‘발견의 여행’이 될 것이지만, 그 발견은 산 정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펼쳐진 경치를 보고도 주위 사람에게 그 풍경을 충분히 설명해 줄 수 없거나, 그 산에 올라가겠다는 사람이 아니면 대화할 수도 없는 외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런 외로움을 감히, 알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유럽인들 사이에서 동아프리카 마사이족은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을 지닌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이교도들 중에서도 가장 고집이 세고 질긴 사람들로서 수백 년 동안 외부로부터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출신 도노반 신부는 주로 탄자니아의 마사이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처음에 그는 마사이족들과의 관계는 어둡고, 시간적으로 소모가 많고, 지루하고, 비용이 많이 들며, 친구가 되었어도 하느님에 대해 말할 가능성은 없다고 하였다. 신에 대해 기꺼이 말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는 데에만 100년은 족히 걸릴 것 같이 보인다고도 했다. 그러나 신부는 마사이마을 사람들과 신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의 이 가정(假定)을 버려야 할 나쁜 생각이었다고 고백한다.

마사이족 마을의 밤은, 밤의 어두움과 야생동물 그리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악령에 대비한 가시울타리만이 있을 뿐, 빛이 없고 인위적인 소리도 없다. 밤마다 들리는 소리는 자연의 소리,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 막사를 두드리고 마당에서 튀어 오르는 빗방울 소리, 타다닥 타들어가는 모닥불 소리, 이따금씩 들리는 사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뿐이다. 가까이 사자의 노란 눈알을 볼 때도 있고, 새벽에 사자들이 사냥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마사이 마을에서 고독한 칠흑의 어둠을 견디고 있는 한 인간의 적막감이 시리도록 와닿았다.

세렝게티 평원과 탄자니아, 아프리카 마사이족, 이런 단어들이 주는 신비롭고 야만적인 이미지와 유럽의 그리스도교는 썩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일부다처제이고, 할례를 받아 전사가 되고, 사자를 신봉한다. 그들의 언어에는 미래 시제가 없다. 어떤 형태의 변화에도 우선적으로 저항한다. 유일신 ‘엔가이’를 깊이 믿으며 악령을 두려워한다. 조상을 숭배하지 않고, 불사불멸을 믿지 않으며, 죽은 사람을 묻지 않는다. 또한 마사이족 삶과 언어에는 그리스도교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 전혀 없다. 위격, 창조, 은총, 자유, 영혼, 불멸성 같은 말이 없다. 형제의 개념도 없다. 이런 이유로 그곳에서의 선교는 먼저, 중심에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신부는 마사이 마을에서 영향력 있는 원로를 만나 사람들을 모아주기를 부탁하고 그들에게, 선교사가 오기 훨씬 전부터 당신들이 이미 하느님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신은 모든 민족이 각자 그들의 문화와 부족적, 인종적 관습과 전통을 통해 구원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는 사실과, 선교사는 한 민족의 문화를 존중할 뿐 파괴해서는 안 되며, 복음의 강생은 해당 문화의 민족에게 달려있음을 터득하기에 이른다.

미국인들은 모든 전투에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을 확신했고, 히틀러도 연설과 모험에서 전능하신 하느님의 도움을 청했다. 무솔리니의 군대가 에티오피아를 향해 출전할 때 교황이 축복을 기원한 신, 베트남전에서 미국추기경이 그리스도의 군대에게 축복을 내려달라고 기원한 신, 그러한 신이라면 마사이족이 믿는 엔가이 못지않게 한 부족의 신일뿐, 성경의 지고한 하느님은 아닌 것이다. 구원에 대해서도 구원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거룩함과 선함의 결과이며 지속적이고 중단되지 않는 단일한 과정이다. 구원이 유과 미국 또는 교회의 구성원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다. 영혼의 구원, 자기완성, 자기실현을 위한 목표는 불교나 그리스철학, 현대 심리학에 해당될 수 있으나 올바른 그리스도교 지향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밖으로 향하는 힘이어야 하고 교회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온전한 의미이다. 내부로 향하는 교회는 배타적이고 편협한 것이 될 뿐이다.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 또한 마사이 마을에 있었다. 그곳에는 경쟁이 없다. 공동체 내에서 누구도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어 보였다. 개인으로 튄다는 것은 그다지 가치가 없었다. 아름다운 소녀는 그것으로 인정받았고, 사람들은 뛰어난 운동선수, 무용수를 지목하며 재능 있는 사람이 자기 공동체에 영예를 가져다줄 것을 기대하였다. 마을에 어려움이 닥치면 용감한 전사가 있다는 것에 모든 전사들이 기뻐했다. 레그와난(족장)이 된다는 것이 성격이나 인품의 고결성을 의미한다고 해도 선망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 명예를 얻은 이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택받았음을 슬퍼했다. 공동체는 각자가 가진 재능을 받아들이고 인정했으며 선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그들 중, 마사이 청년 ‘올레시키’는 키도 크지 않고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외모에 다른 마사이 청년들처럼 늠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직하고 상대를 차분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성경, 교리, 전례, 교회사 등의 심화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결혼하였다. 선교사를 만나기 전에는 이교도였고, 일 년 후에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다음 해에 사제가 되었다. 가톨릭교회에서 문화적인 특수한 경우에 한하여 결혼 후 사제가 되는 것을 허용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레바논, 시리아 등의 중동 지역과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에서 그렇게 한다. 이는 성소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신앙심이 깊고 교회에 호의적인 인물이 사제가 되고자 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제가 된 상태에서는 결혼할 수가 없다.

사자의 팔, 아프리카인들은 동물의 앞다리를 팔이라고 표현한다. 전사, 마사이족에게는 ‘10대’나 ‘청년’이란 말이 없고 젊은이는 모두 전사이다. 노인들은 문 앞에 서서 소가 들어오는 것을 감독하고 소를 숫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돌아왔는지 확인한다. 미래 시제가 없는 언어를 쓰는 이들은 부활에 대해서 평생 궁금해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늦은 밤까지 춤추고 노래 부르며 축제처럼 미사를 즐기는 모습이 영상을 보듯 지나간다. 그리스도 복음의 토착화는 만민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어느 곳에나 이미 와 계시는.

책을 놓으며 아름다움과 숙연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한 사람이 지닌 힘의 방향과 크기에 대해서도. 존재가 주는 감동의 파문이 낯설지만 다감하다. 보편을 지향하며 타닥타닥 모닥불 타들어가는 소리처럼 비가 내리는 여름밤, 초원을 누비는 사자와 같이 나의 걸음은 늘 같지만 언제나 같지 않을 것이다.

<빈센트 J. 도노반 『선교사보다 앞서 가신다』를 읽고>




작가의 이전글캄보디아 왕국과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