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보다 짐이 많지 않다. 책이 대부분이다. 작은방 구석에 쌓아놓고 한동안 보냈다. 정리해야지 마음먹고, 책꽂이를 비우기 위해 오래된 서류파일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다. 중요하다고 보관해 왔던 문서 대다수를 미련 없이 버리다가 손이 멈췄다. 온몸에 새로운 피가 돌 듯 순간 각성된다. 당시의 공기, 표정, 분위기, 공간으로 시간 여행하듯 이동한다.
어둡고 바람 몰아치고 추웠다. 물러설 틈이라곤 없는 벼랑 끝이라 절박했었다. 떨어져 죽거나 대들다 쓰러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쩌면 직장을 그만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에 ‘그럼 우리 뭐 먹고살아?’ 예상외로 현실적이었던 딸의 말이 무의식에서 튀어나와 펄럭인다.
열심히 하는 것과 ‘진짜 열심히’ 하는 것은 다르다. 다른 건 몰라도 진짜 열심히 살았다. 타고나길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이 아니다. 처지와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정말 열심히 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치고 고단했던 세월이다. 하나 남은 에너지까지 끌어다 쓰며 버틴 날들이다. 크고 작은 고비는 물론 더 있었지만 이런 경우 보통 견뎌내기 어렵다. 당시 몇 사람이 본인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힘과 용기를 보태었다.
이 산을 넘고 묵묵히 걸어와 지난 연말, 정년을 맞았다. 미련이 있을 리 없다. 일이 년 더 촉탁으로 있어달라는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했다. 지겨운 모양이라는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지겨운 게 아니라 겁이 난다. 팽팽히 당겨진 줄 위를 걷듯 조마조마하고 두려운 긴장감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다. 그래도 되는 때가 왔으니.
○○○ 감사님께
우선 불미스러운 일로 이런 글을 올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되도록 간단히 서술하겠습니다.
이번 시청감사는 2월 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회계담당인 제가 시에서 요구하는 자료를 제출하느라 감사계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저 개인이 공금유용이나 횡령의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빌미를 주었다는 걸 분명히 인정(딸 명의 통장)합니다. 그렇게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부끄럽지만 사실대로 감사계에 말하였습니다.
감사계에서는 3년간 인터넷뱅킹계좌이체 증빙서류를 모두 제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전 개인적인 명예회복도 있고 문화원과 원장님께 누가 되는 결과를 남겨선 안 되겠기에 직원들(☆☆☆, △△△)과 며칠간 밤 11시까지 사무실에 남아 2004년~2006년 3년간의 정산서를 뒤져가며 보조금에 대한 모든 자료를 복사하여 제출하였습니다.(A4용지 931매)
그런 과정에서 두 분 원장님(이임, 취임)도 알게 되었으며, 시에서 보조금에 그치지 않고 ‘자체회비’에 대한 증빙자료까지 요구하였고 그 부분은 전임 원장님께 보고해 시(문화진흥과)에 정식 공문서요구를 하고 그에 따라 처리하였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3월 14일, 이사회 날 오전 문화진흥과 담당주사가 ‘감사결과처분통지’ 공문을 가져왔습니다. 처분지시는 공문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주의’입니다. 마지막 ‘3. 조치할 사항’에도,
‘앞으로는 - 중략 - 바랍니다.’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이사회 시작 전 신임 원장님이 부르셔서 면담을 하게 되었을 때(공문 탁자 위) 제게 그만둘 의사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전 이렇게 불명예스럽게 퇴직하기는 어렵겠다는 뜻의 대답을 했습니다. 이사회가 끝나고 다시 부른 자리에서 모든 이사님의 뜻이라며 재차 퇴직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지금의 제 심정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1997년 9월 문화원이 개원준비를 하는 시점에서부터 근무를 시작해 올 3월로 9년 7개월이 됩니다. 그동안 좋은 일, 보람된 일, 즐거운 일, 어려운 일, 괴로운 일 등 많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만한 근무연한을 채울 수 있었던 건 그동안의 원장님을 비롯해 여러 임원 여러분의 애정과 배려 덕분이란 걸 잘 알고 있으며 늘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시점이 정리할 때라면 받아들일 마음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듣기에 이사회에서 공문을 이사님들께 공개하였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나 괴로운 마음입니다. 제 개인의 인격과, 보잘것없으나 제 명예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어 너무나 불편합니다.
외람되나 감사님께서 이런 모든 정황을 판단하시어 다른 이사님들께 객관적으로 설명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가족 모두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빕니다.